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불현듯 학생들 속에서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남궁 교장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미래의 세상에서는 악과 증오보다는 선과 사랑이 널리 퍼져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이기심, 탐욕, 폭력이 사라지고 모두가 함께 즐기고 사랑하는 세상을 꿈꾸어 봅시다.

성경에도 나오듯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으며, 그들의 새끼가 함께 어울려 놀고, 사자가 소를 부드럽게 쳐다보는 평화의 낙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주적인 진리를 깨우쳐 이웃사랑을 한 걸음씩 실천해 나간다면 그런 미래는 꼭 오리라고 봅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때때로 악의 세계로 후퇴할 경우가 있어도 결국엔 그것을 극복하고 차츰차츰 아름다운 선의 세계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가장 힘겹고 어려울 때 아름다운 쪽으로 한 발짝이라도 떼어 놓는 그 정신이 중요합니다. 그 한 발짝이 하루, 한 달, 한 해가 지나면 천지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학도들이여, 아무쪼록 여러분이 이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 이 민족과 온 인류의 빛이 되길 바랍니다.”

흰 수염을 휘날리며 늠름하게 연설한 교장 선생님을 향해 학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남궁억 교장이 직접 작사 작곡한 모곡학교의 교가가 학생들의 합창으로 교정에 울려퍼졌다.

동막산과 강구비 앞뒤 둘렀고
모곡구역 모곡리는 우리 집이라
세상 영화 누릴 자는 우리들이며
그 가운데 뜻 부칠 손 모곡학교라

굳거라 너희 믿음 변하지 마라
마음과 뜻을 거룩하게 실행하여서
죽고 살고 화와 복을 상제께 바쳐
천당 배를 타고 가자 우리 동무야….

함께 합창을 하는 남궁 교장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모곡학교는 수업 연한 4년에 보통학교 수준 정도의 학과를 가르쳤다. 교과목은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을 다양하게 포함하여 국어, 산술, 역사, 영어, 실업, 음악, 체조, 서예 등이었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남궁억은 특히 국어와 역사 교육을 중요시했다. 우리말을 못 쓰게 하던 시절이라 「조선어 보충(朝鮮語補充)」이라는 우리말 교과서를 직접 써서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조선어 보충」은 재미있는 옛날의 역사 이야기와 독립운동 투사들의 활약상을 모아 놓은 책이었다. 그런데 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인 까닭은 총독부가 학교에서 조선 역사를 가르칠 수 없게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남궁억은 교장이자 교사로서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그의 인품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교육열을 존경하여 잘 따랐다. 남궁억은 그동안 사회 각 분야에서의 활동을 통해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보리울에서 불태웠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우리 민족을 앞으로 짊어지고 갈 인재의 육성에 있었다. 그래서 암기 위주의 교육을 하기보다는 학생들이 스스로 탐구하여 지식을 넓히고, 단편적인 알음알이보다는 이해심과 포용력을 갖춘 지도적인 인격을 완성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정규과목 외에 정서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방과 후 시간을 이용해 독서회를 조직하여 함께 책을 읽었다. 그는 말하곤 했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음식과 같아서 우리 정신의 보약이 됩니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분들을 우리는 지금 직접 만나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책을 통해 그들의 삶과 철학을 배움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장 선생님, 만화는 보면 안 되나요?”

다른 아이들은 키득키득 웃었지만 질문자는 나름 진지한 표정이었다.

“좋은 만화는 좋은 책입니다. 다만 너무 많이 보면 귀중한 시간 낭비이니 안 되겠지요. 사실 일반 책 중에도 나쁜 책이 있으니 잘 골라서 봐야 합니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고르는 것도 아주 중요한 능력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책이 나쁜 책인가요?”

눈이 큰 소년이 물었다.

“사람의 정신을 높여 주고 마음을 아름답게 해주는 책은 좋은 책이고, 그 반대로 사람을 저급하고 추악하게 만드는 책은 나쁘다고 해야겠지요.

또한 사람이 스스로의 정신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을 양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더 큰 세상을 깨닫게 되는 거죠. 억지로 어떤 이론을 주입시키거나, 정신을 마취시켜서 세뇌하는 것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지금 일본은 자기들이 가장 뛰어난 인종이므로 온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책과 신문과 방송 등을 통해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거짓된 지식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단련해야만 합니다.”

좋은 책을 돌려 읽고 난 후에는 서로 토론을 벌여 남들의 생각을 알게 하고, 독후감 쓰기를 장려하여 사고력을 기르도록 했다.

또한 학기말마다 학예회를 열어 음악, 시, 연극, 미술 등 예술에 대한 학생들의 재능을 발견하여 키워 주었다. 집안이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수업료를 면제하고 공책과 연필 등을 무료로 나눠 주었다.

교사는 남궁억 교장을 포함하여 모두 4명이었는데, 그 중에는 그의 첫째딸인 남궁숙경도 있었다.

숙경은 일찍 결혼했으나 남편과 사별한 뒤 어린 딸을 데리고 보리울로 내려와서 집안 살림을 맡아 하는 한편 아버지를 도와 모곡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남궁억은 영어와 음악 수업도 자신이 직접 맡아서 했다. 그리고 서예에 조예가 깊어 학생들에게 한글 붓글씨를 가르쳤다.

외솔 최현배가 「우리 말본」과 「중등 조선 말본」을 펴낼 때 책의 제목을 붓글씨로 써 달라고 부탁해 와 그렇게 해주었을 정도였다.

그런 예능교육은 교육자로서의 남궁억의 섬세함과 낭만적인 감성 그리고 뜨거운 열정과 인간애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는 남이 저술한 교재를 그대로 채택하지 않았다. 지은이의 고지식한 이론을 메마르게 늘어놓은 교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궁억은 이론과 실천이 생활 속에서 항상 조화를 이루도록 탐구하여 스스로 쓴 교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교육을 배격하고 우리 민족의 전래된 미풍양속을 강조하길 잊지 않았다.

또한 총독부에서 편찬한 음악 교과서를 무미건조한 내용이라고 비판하고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를 가르쳤다. 음악 교육을 통하여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의 심성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독립의식을 형성하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실업 시간에는 학생들을 이끌고 운동장 옆에 마련해 둔 밭으로 나가 농사짓기를 실습했다. 그리고 마을의 빈터에다 나무를 심어 푸르게 가꾸도록 해 자연스럽게 애향심이 마음속에 스며들도록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실내에서 새끼 꼬기, 가마니 짜기, 짚신 삼는 법을 가르쳤다. 그것들을 홍천장에 내다 팔아 학비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언젠가 큰비가 내려 마을 앞의 다리가 무너졌을 때는 “우리 마을은 우리 손으로 지킨다!”라고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을 인솔해 가서 새로운 다리를 놓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 정신과 협동심의 생생한 실천이었다.

체육시간은 항상 하루 일과의 맨 마지막이었다. 때로는 홍천강에서 수영을 하거나 높은 산에 함께 올라 심신을 단련하고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체조 연습을 한 뒤 유리봉에 오르도록 하겠습니다.”

“야, 해방이다! 나는 자유인이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산에 가면 솔바람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간혹 토끼나 다람쥐를 잡을 기회도 있기 때문이었다.

“자, 출발!”

남궁억 교장이 외치자 학생들은 줄을 지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산을 향해 뛰어 올랐다. 가장 먼저 산꼭대기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환갑이 가까운 남궁억도 나이를 잊은 채 마치 ‘백발의 소년’처럼 뛰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뒤처지고 말았다. 남궁억은 노루처럼 뛰어오르는 아이들을 쳐다보며 껄껄 웃었다. 그러다가 즉석에서 노래를 한 곡조 지어 뽑았다.

“금수의 강산에서 우리 자라고
무궁화 화원에서 꽃피려 하는
배달의 어린 동무 노래 부른다
세상의 부러울 것 무엇이냐
동녘 하늘 붉은 해 그 빛 찬란코
태극기는 창공에 펄펄 날리고
빛나게 잘 살아라 우리의 조선….”

그 노래에는 남궁억 자신의 깊은 소망이 깃들어 있었다. 교장 선생과 함께 가던 몇몇 아이가 그 노래를 따라 부르자 바람결을 타고 모든 아이들에게 전해져 마침내 유리봉 꼭대기에 오른 아이들까지도 합창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청아하고 힘찬 합창이 메아리가 되어 산골을 쩡쩡 울렸다.

이윽고 유리봉 꼭대기에 오른 남궁억은 심호흡을 하여 숨결을 가다듬고 나서 말했다.

“그렇다. 우리 배달의 어린 동무들이여! 우리가 참되고 힘차게 살아 나가면, 마치 헐은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 아물고 그 후 낡은 딱지가 떨어져나가듯이, 저 악독한 일본의 압제도 새살을 못 이기고 마침내는 떨어져나갈 것이다. 참되고 씩씩한 배달의 새싹들이여, 만세!”

남궁억은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그 메아리가 산골짝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배달 민족 만세! 만만세!”

아이들도 따라 어린 목청을 힘껏 울렸다.

유리봉 정상의 하얀 바위 위에 앉은 산까치 한 마리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