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은 인간의 심리영역에 근거를 둔 심리의 산물,
믿음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를 둔 성령의 영역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신앙은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적인 것에 의존되지 않는다.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을 비롯해 영적 실재(實在)들을 오감적 체험방식으로 표현한 것은 하나의 상징일 뿐, 실제로 그랬다는 뜻이 아니다.

한 예로 사도 요한이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성자)에 관해 듣고 주목하고 만졌다(요일 1:1)’고 한 것은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 사람의 육체를 입은 것을 보았다는 말이지, 신성으로서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직접 눈으로 손으로 보았다는 말이 아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in one's vol, 1,955쪽).

영원한 ‘생명의 말씀(성자)’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오감으로는 감지될 수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이‘사람들의 눈을 열어보게 했다’는 표현들이 나오는데, 이는 오감의 ‘시각(視覺)을 열어 보게 했다’는 말이 아닌 소위 ‘영적 안목’을 열어주었다는 뜻이다.

‘엘리사의 사환의 눈이 열리고(왕하 6:17)’, 예수님의 떡을 받은 ‘두 제자의 눈이 밝아진 것(눅 24:30-31)’은 다른 말로 하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았다(엡 1:17)”,“마음을 열렸다(행 16:14)”는 말에 다름 아니다.

신적 실재(實在)에 직접 접촉한다는 신비주의자들은 이런 우리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 이들의 궁색한 핑계라며 비아냥거린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그런 비아냥을 흘려듣는 것은 영적 실재를 말씀을 통한 영각(靈覺)으로가 아닌, 오감으로 감각(感覺)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감각 세계의 법칙이 있듯이 영적 세계의 법칙이 따로 있고, 둘은 상호 교호(相互 交互, interactiveness) 할 수 없다. 오감이 영적 실재를 접촉하는데 무용하다는 것은 예수를 직접 접촉했던 동시대인들의 반응에서 확인된다.

많은 사람들이 실물(實物) 예수를 접촉했지만, 소수의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은 베드로(마 16:17) 같은 이 외는 그를 하나님으로 알아본 이들이 없었다.

하나님의 가르침 없이 단지 오감으로 성육신한 하나님 예수를 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혼란만 일어났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사 6:9)”는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은, 예수께서는 오감이 아닌, 오직 성령으로만 알려진다는 확증이기도 하다.

영감(靈感)과 오감(五感)은 존재 영역과 존재 방식이 다르기에 함께 병립(竝立)되거나 상호 교호(相互 交互, interactiveness) 할 수 없다.

오감적 확신을 더하는 데는 실물, 감각, 지성, 물리적 시공간 등이 기여할 수 있으나,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 확신에는 전혀 아니다. 영적 확신은 애시당초 오감이 아닌, 오직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얻도록 하셨다.

물론 성경에는 이와 상반돼 보이는 듯한 사례들도 있으나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한 예로 도마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의 상흔(傷痕)을 보고 믿은 경우이다. 그러나 이는 상흔이 주는 시청각적인 효과로 예수를 하나님으로(요 20:28) 믿게 됐다는 말이 아니다.

상흔을 보고 예수가 선지자들이 말한 그 ‘하나님의 아들’임을 유추해 믿은 것이다. 곧 그는 예언에 근거한 계시적 믿음을 갖게 된 것이지, 감각에 기반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감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반감시키고 혼란을 야기한다. 종교다원주의적 신앙도 이런 혼란에서 기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 들어가려면 감각적인 육체를 벗어야 한다 는 사도 바울의 말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고후 5:6).”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은 말씀 중심의 신앙을 추구하며, 다만 확신을 더하려고 오감적인 것을 보조 교재로 조금 활용할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이 역시 오십보 백보이다.

영적 신앙에 오감을 첨가시킬 때 영적인 왜곡을 낳고, 나아가 성령의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영적 신앙에 오감의 체험을 덧붙이는 것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고(마 9:16)’,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게 만들어(갈 5:9)’전체를 못 쓰게 만드는 것과 같다.

◈감각적 확신을 뛰어 넘는 성령의 확신

성경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확신이(살전 1:5) 감각 세계의 확신에 결코 뒤지지 않음을 말해주는 실례(實例)들이 많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모세의 하나님 확신은직접 하나님을 보므로 갖는 확신에 뒤지지 않았다고 했다(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히 11:27).”

예수님이 음부(Hades, 陰府)의 부자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 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고 하신 말씀에서도, 음부에 대한 믿음은 죽어 그곳을 보고 온 경험자가 들려주는 감각적 호소보다 말씀에 의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인간 지고의 기쁨, 곧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은 눈으로 예수를 직접 봄으로서가 아닌, 비시각적인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벧전 1:8).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확신’‘죄사함’‘구원의 확신’도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얻게 하셨다(히 11:3, 벧전 1:8-9, 롬 10:13-17, 엡 1:13, 딤후 3:14).

세간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나 막연한 성경으로부터 죄 사함을 선언 받는 기독교보다, 실물인 신부(神父)로부터 직접 사죄의 선언을 듣는 로마 천주교의 고해성사가 죄의식 탈출에 더 효과적이다는 말들을 한다. 심리학적 측면에서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말 그대로 심리학적인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죄 사함’의 확신과는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죄 사함’과 ‘죄의식에서의 해방’은 죄 사함의 복음을 통한 성령의 감동으로만 주어진다. 성경은 죄를 자백한 대상을 분명히 하나님으로 못 박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영적인 일들에 감각적인 것들을 차용할 당장은 뭔가 효과를 내는 듯하나, 결과적으로는 신앙을 저급한 감각적이고 심리학적인 차원으로 전락시키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

신앙에서 신념(信念)을 경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견‘신념’은 ‘믿음’과 유사해 보이지만 전혀 그 속성이 다르다.

‘신념’은 마음 작용의 산물이고 ‘신앙’은 말씀에 기초한 성령의 산물이다. 전혀 다른 차원의 ‘신념’을 ‘신앙’에 차용할 때 고귀한 신앙은 저급한 심리주의 메카니즘(mechanism)으로 전락된다.

신념은 결코 믿음을 만들어 내거나 믿음을 향상시키지 못한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행 3:16)”이라는 말은 ‘예수께 뿌리박은 믿음’이라는 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신념은 인간의 심리영역에 근거를 둔 심리의 산물이라면, 믿음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를 둔 성령의 영역이다. 신념은 자기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믿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인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만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위에 세워진 믿음(고전 2:5)이 바로 이 믿음이다.

혹 일부 설교자들 중에 교인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넣어주기 위해 복음이 아닌 심리적으로 조작된 신념을 청중들의 마음에 투사시키는 것을 가끔씩 본다.

그리고 그렇게 신념화된 믿음으로 때때로 상당한 결과물들을 내어놓기도 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대단한 성취감을 맛보게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집단 체면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산물은 아니다. 두려워할 만한 일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