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박진호 목사의 신앙문답]을 매주 1회 연재합니다. 미국 남침례교단 목사인 그는 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의 글은 박 목사가 운영하는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그가 직접 쓴 것으로, 본지는 박 목사의 허락을 받아 이를 게재합니다. 아울러 필자의 요청에 따라, 글이 그의 웹페이지에 게시된 날짜를 맨 아래 밝혀둡니다.

성경, 남자
▲ⓒPixabay
[질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 죽으신 것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지 율법을 지키는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사람으로 거듭나 죄에 대해 죽었지만 여전히 육신에 그 흔적이 남아있어서인지 저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죄를 짓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는 있지만 자주 죄에 무너지고 있습니다. 물론 선행구원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죄에 넘어질 때마다 저의 영혼이 자유롭지 못하고 죄책감만 늘어납니다. 그렇다고 그런 부담을 안 느끼려고 죄에 둔감해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혹시 이 둘 사이의 적절한 선을 찾을 수 있을까요? 성화에 대한 부담감에서 힘을 빼는 비법이 없을까요?

[답변]

구원 받았다는 의미는?

많은 신자들이 실제로 갈등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내놓고 의논하기 꺼려하는 문제입니다. 자칫 믿음이 약한 자로, 심지어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로 취급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친절히 상담에 응해주는 분들에게선 그럴수록 더욱 기도와 말씀에 정진하라는 원론적이고도 익히 알고 있는 답변만 돌아옵니다.

이런 갈등을 느끼는 것은 신자로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믿음이 자라간다는 증표입니다. 신자는 그 영혼에 꽈리 틀고 있던 사탄의 진이 무너지고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은 후에는 필연적으로 아주 사소한 죄들까지 예민하게 인지할 수 있어서 이전보다 더한 죄책감을 느끼며 또 그럴수록 더욱 주님을 닮아가고 싶다는 거룩한 부담감이 생깁니다.

그런 죄책감과 부담감으로 인해 질문하신 대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또 다른 고민도 생깁니다. 내 믿음이 아직도 이 정도 밖에 안 되는지 한탄이 나오며 뭔가 쉽고도 화끈한 성화의 비법이 없는지 궁금해집니다.

죄송하지만 그런 지름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면 좁고 협착한 길을 외롭고 힘들게 걸어야 하며 심지어 환난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이 질문에 대한 첫째가는 답변은 기대하시는 그런 비법은 없으므로 매일 조금씩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왕에 질문을 주셨으니 "성화의 부담감에서 힘을 빼는 비법(?)"을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문제이든지 그 원인을 정확히 알면 올바른 대책을 세울 수 있는 법입니다. 이런 갈등이 생기게 되는 근본 이유는 사실은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해서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8-10)

바울사도가 예수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를 설명한 말씀입니다. 죄인으로 하나님과 여전히 원수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기를 대신해 죽은 보혈의 공로로 인해 그분과 화목되었고 그분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구원을 정의(定意)했습니다.

주지해야 할 사항은 죄의 습성이나 성향 등을 완전히 씻어서 깨끗케 한 후에 구원했다는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 입장에선 죄의 본성은 그대로 살아있는 채 단지 그 신분이 하나님 밖의 원수에서 그분 품안의 자녀가 된 것뿐입니다.

요컨대 죄인이 의인으로 바뀐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자신하던 완악한 죄인에서 단순히 용서 받은 죄인이 된 것입니다. 죄와 별개로 사람만,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관점만, 바뀐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은 후에도 일반적인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으로 하나도 이상히 여길 것 없습니다.

칭의와 성화의 차이는?

흔히 구원을 죄에서 구원받은 것이라고도 설명하는데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바울이 상기구절에서 설명하듯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 받은 것 즉, 영원한 죽음으로 예정되어있던 형벌에서 완전히 면제된 것입니다.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던 자의 인생의 진로를 하나님이 천국으로 영원하고도 확고히 바꿔준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거역 외면했던 죄에서 구원 받은 것으로 칭의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거역했던 것이 자신의 지난 모든 실패와 죄악의 원인이었음을 절감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 헌신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필요도 이유도 전혀 없는 의인이라고 스스로 큰소리쳤습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어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사탄의 진이 무너지자 자발적으로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소망과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단지 얼마나 거룩해지느냐는 실천 여부만 남았는데 바로 예수 믿은 후의 성화의 과정입니다.

놀랍게도 많은 신자들이 예수 믿으면 이전에 말과 행동으로 지었던 개별적이고도 윤리적인 죄들에서 구원 받은 것으로만 오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구원은 사탄과 죽음과 죄악에 묶여서 하나님과 반대로만 걸어갔던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 당신께서 그리스도와 생명과 빛으로 180도 유턴시켜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은 후 성화를 이뤄감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방향과 소망과 열정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지 도덕적 종교적으로 의로워지는 것은 부차적인 차원이 됩니다. 예수 믿고 나면 아무래도 불신자시절보다는 훨씬 도덕적으로 의로워집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다른 이보다 훨씬 의롭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도 그래서 당신의 자녀가 된 신자들의 윤리적 잘못은 언제든 입술로 자백 회개만 하면 기꺼이 용서해주시며 그로 인해 은혜를 적게 베풀지도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신자가 항상 가장 많이 힘을 쏟아야 할 부분은 자기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실제로 주님만 따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긴 소명이 분명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만 헌신 충성하면 일상적인 윤리적 죄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습니다. 바울이나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못하는 것으로 가장 괴로워했지, 윤리적인 죄 한두 개 범한 죄책감에 빠져 심령의 평강과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 것으로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바울이 죽음과 방불한 엄청난 고난들을 수없이 겪으면서도(고후11:23-27) 모든 연약한 교회들을 위한 염려가 가장 큰 고뇌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연약한 성도들이 혹시나 실족하면 자신의 실족으로 여기고 가슴 깊이 아파했습니다.(28,29절) 오늘날 모든 신자들이 성화를 이뤄나감에서도 가장 먼저 깊이 새겨듣고 따라야 할 말씀입니다.

단순히 전도 선교에 열심을 내어야 하고 성도들을 진심과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는 종교적 의무를 요구하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정말로 괴로워하는 대상과 그 의미가 불신자 시절과는 완전히 바뀌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믿지 않을 때는 일신상의 현실적 고난이 가장 힘들었고 신자가 된 후에도 기껏 도덕적 죄책감으로만 괴로워합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이 내 주변에 확장되지 않고 정체 퇴보되고 있는 일이 가장 크고도 첫째가는 괴로움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화를 이루는 비법은?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작금 대부분의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도덕적으로 조금 더 선해지고 종교적으로 더 경건해지는 것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니까 윤리적 죄를 지으면 괴롭고, 그 죄들을 없애려 해도 제대로 진전이 없고, 성경의 진리를 알면 자유와 평강을 누린다고 배웠는데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죄에 무감각해져서 세속과 타협하려니 자꾸 답답해지고 신자가 절대 범해선 안 되는 더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두렵기만 합니다.

신앙이란 도덕적인 의로움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을 따라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온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신앙을 도덕 종교 수준으로 인식해선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실제로 바울처럼 인생을 걸고 달성할 구체적인 소명을 받아서 그대로 헌신하고 있다면 어떻게 그 일을 실천할 것인지가 최고 큰 고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신자라면 당연히 도덕적 죄에서도 이기고 거룩해지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마저 우리와 성정이 동일하고 연약한 인간이라 윤리적 죄에 종종 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1-24)

그래서 그가 얻은 결론 즉, 질문자가 원하는 비법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구원의 확신을 되새기고 자기 육신을 좇지 않고 오직 성령의 법을 따르기로 했습니다.(롬7:25-8:4)

여기서 말하는 육신(flesh)은 육체(body)가 아니고 불신자 시절의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모든 일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여 시행하려는 끈질긴 습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육신만으로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지만, 칭의의 구원을 받기 전 뿐 아니라 그 후의 성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법을 따르면 율법의 요구(도덕적 의로움)까지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박진호
▲박진호 목사
신자 속에 죄의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해서 윤리적 죄를 저지르고 싶다는 욕심을 말하지 않습니다. 신자 중에 어느 누구도 그런 자는 없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사소한 죄에도 더 민감해져서 어떻게든 거룩해지려고 노력합니다. 반면에 여전히 모든 일을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의지와 능력으로만 달성하려는 습성이 끈질기게 남아 있습니다. 성화를 이룸에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노력에만 의지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는 마땅히 의지적으로 성화를 이루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 안 된다고 해서 과도한 죄책감을, 또 그러다 심령이 너무 괴로워 죄에 무뎌지려 해선 결코 안 됩니다. 그럴수록 더욱 힘을 내어서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분 가시는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질문자께서 "성화에 대한 부담감에서 힘을 빼는 비법이 없을까요?"라고 물었는데 실은 질문 안에 이미 정답이 들어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성화에 대한 부감감에서 정말로 자신의 힘을 빼는 것이 바로 그 비법입니다. 성화에서도 자기가 주체가 되려는 생각이나 고집을 죽여야 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일단 부인하고 완전히 하나님께로만 마음을 활짝 열고 진정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쉬지 말고 마음속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 또 그렇게 되려면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 안에서만 세우는 것 즉, 자신만의 소명을 확정짓는 것이 가장 좋은 방안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해서 죄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면 자연히 죄는 극복됩니다. 윤리적 선을 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의 소명을 실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선이기에 최선의 방안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생명이 속에서부터 넘치는 인생이 됩니다. 만약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면 성화에 대한 부담감이라도 완전히 빼내어야 합니다. 그럼 최소한 평강이라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롬8:39) 자기에게 맡긴 하나님의 일에만 충성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자 기쁨이 되었습니다. 윤리적 죄가 그를 더 이상 괴롭힐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그리스도가 가신 길만 따라갔습니다. 성화에 대한 비법, 나아가 복음 안에서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길에 대한 유일하고도 최선의 해법입니다.

2019/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