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故 한경직 목사님의 생전 설교 전문을,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제공으로 매주 한 차례, [그 때 그 설교] 코너에서 소개합니다. 한 목사님은 얼마 전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고인의 생전 설교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생생히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한경직
▲故 한경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고린도후서 5:14~21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장 19절을 다시 봉독하였습니다.

인간이 가장 사모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아마 평화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이 평화란 뜻을 가진 말이 몇이 있습니다. 평강, 혹은 평안, 혹은 안녕, 이런 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사를 할 때에도 아침에 만나면 안녕히 주무셨는가 묻습니다. '평안히 잤는가' 하는 뜻입니다. 저녁에 헤어질 때에는 안녕히 주무십시오. '평안히 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언제 만나든지 제일 먼저 인사하는 말이 평안한가 묻습니다. 또는 우리가 서로 헤어질 때에는 언제나 평안히 계시라고, 이런 말로써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할 때에도 이런 말로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의 서신을 보면 언제나 은혜와 평강이 같이 하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옛날 사람이나 현대인이나 평화를 사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세계를 보면 어떠합니까? 사실 평화는 잡기 어려운 것입니다. 평화로운 마음도 많지는 않습니다. 평화로운 가정도 많지 아니합니다. 평화로운 사회도 많지 아니합니다. 평화로운 나라도 많지 아니합니다. 평화로운 세계는 찾기 어려운 것입니다. 도처에 분쟁이 있고, 분규가 있고, 동맹 파업이 있고, 데모가 있고, 납치사건이 일어나고, 냉전과 열전이 거듭되는 이러한 세계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문자 그대로 불안과 공포의 세계인 것입니다. 이런 세계에서 가장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평화입니다. 평화로 인도하는 화해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요샛말로 하면 "화해하게 하시며"입니다. 또는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화해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고 했어요. 또 조금 내려가서는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혹은 "하나님과 화해하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한마디로 표현하고자 하면 아마 '화해'라고 하는 말이 가장 적절할 줄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몇 해 전, 미국 연합 장로교회에서 소위 1967년 신조를 새로 제정할 때에 이 '화해'라고 하는 말을 중심으로 그 신조를 제정한 것을 우리가 읽어 봅니다. 약 한 달 전,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세계개혁교회연맹이 모이게 되었을 때에도 그 주제가 '화해'라고 하는 이 말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문자 그대로 화해의 복음이올시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길을 열어주신 것을 먼저 우리에게 선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해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골로새서 1장 19절 이하를 읽어 보아도 같은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 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권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고의로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사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심령 깊은 속에는 공허감, 고독감, 죄책감, 공포감, 좌절감 등이 쌓이게 되어서 그 내심의 평화가 상실되고, 인간 상호 간에도 불신과 의구로 인하여 평화가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의 길을 도저히 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길을 스스로 열어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십자가에서 인간이 받을 고난을 대신 받으시고, 성경 말씀대로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화해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깊은 진리는 물론, 그 뜻이 너무 깊고 너무 높고 너무 커서 인간의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의 입으로 다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십자가를 앙망하는 자는 다 죄의 사함을 받고, 마음의 평화를 체험할 수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은 무너지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은 모든 인류를 향하여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에게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과 같이 되리라" 여러분, 과거의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항상 살 수는 없습니다.

옛날 동양 성현의 글에도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에게는 하나님의 지으신 일월성신, 천지만물이 그의 앞길을 막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 길은 내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올시다.

여러분, 다 하나님과 화해하였습니까?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막힌 담이 없습니까? 아직도 탕자와 같이 멀리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영혼은 없습니까? 이 시간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화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우선 이렇게 수직선으로 종(縱)으로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해야 할 것이 더 있습니다. 횡(橫)으로 모든 다른 형제와도 화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둘째로 서로 화해하라고, 형제끼리도 서로 화해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3절에는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간곡히 권합니다. 산상보훈에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내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담을 막고 원수가 되게 하는 것처럼, 역시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담을 막고 원수를 만드는 것입니다.

야곱의 죄가 에서와, 곧 형제간에 담을 막았고, 결국은 원수가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의 죄가 그들과 요셉 사이에, 곧 형제간에 담을 막았던 것입니다. 압살롬의 죄가 그와 다윗 사이에 곧 부자간에 담을 막고, 원수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죄가 있을 때에 부부간에도 담이 막힙니다. 원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올 때에 지금도 형제간에도, 자매간에도, 친척간에도, 친구간에도, 심지어 부자간에도, 모녀간에도 담을 막게 되고, 원수가 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해의 길은 피차에 죄를 회개하고, 피차에 서로 용서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 강변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된 후에 자기의 형 에서를 만나 화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요셉이 그들의 죄를 용서할 때에 형제 사이에 화해가 성립이 된 것입니다. 압살롬은 끝까지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결국은 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서로 화해하라고 권합니다. 사실 인간 상호 간의 화해는 하나님과의 화해의 전제조건인 것을 주님께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예물을 각각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형제와 화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형제들과 옳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하나님과 옳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어떤 때에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듯한 느낌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혹은 여러분께서 암만 하나님께 기도를 하되 그 기도가 응답이 안 되는 경우를 체험해 보신 이 계십니까? 혹 이러한 때를 당하면 내가 내 형제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 사이에 막힌 담이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역시 담이 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혹 어떤 때에 이런 말을 듣습니다. "그 아무개는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서로 말을 안 한다." 물론 인간이니만큼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런 상태를 오래 끌어서는 아니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범하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해가 지도록이라는 말은, 다음 날까지 분을 계속하여 마음에 가지지 말라고 하는 뜻입니다. 곧 화해해야 합니다. 서로 먼저 가서 화해를 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먼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가서 내 허물을 먼저 고하고 화해를 해야 됩니다.

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유명한 <성만찬>의 그림을 그린 화가에 대해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이가 성만찬의 그림을 그릴 때 가룟 유다의 얼굴을 어떻게 그릴까, 생각하다가 자기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 어떤 사람이 하나 있는데, 필연 가룟 유다의 얼굴이 그렇게 생겼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는 자기가 제일 미워하는 어떤 자기 아는 사람 얼굴을 그렸단 말입니다. 가룟 유다의 얼굴로. 그런데 이 그림 저 그림 다 그리다가 맨 마지막에 주님의 얼굴을 그리게 되었는데, 아 주님의 얼굴 암만 옳게 그리려고 할지라도 옳게 그릴 수가 없단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했다고 하는 줄 압니까? "이거 왜 내가 주님의 얼굴 옳게 그릴 수 없을까? 이것은 필연 나와 내 형제간의 막힌 담이 때문아닌가?" 그래서 자기가 가장 미워하던 그 친구를 찾아가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그 친구와 화해를 한 후에 가룟 유다의 얼굴도 다시 그렸고, 예수님의 얼굴도 다시 그렸다고 합니다. 형제간에 막힌 담을 열지 않고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간에 화해가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한 가지 권면을 더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과 먼저 화해해야 하고, 형제간에 서로 화해해야 될 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화해자가, 화해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미 말씀드렸지만 불화와 분쟁이 너무나 많습니다. 부부간에도 불화하는 수가 많습니다. 부자간에도 불화하는 수가 있습니다. 모녀간에도 불화하는 수가 있습니다. 친척간에도 그렇습니다. 친구간에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교인간에도 그렇습니다. 교파에도 그렇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인종과 인종 사이의 불화, 이 세계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계급과 계급 사이의 불화, 노사간의 불화, 현 사회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불화, 세계의 큰 문제들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 이러한 세계에 살면서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가?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고 또한 형제들과 화해할 뿐더러 이런 사회에 나아가서 화평케 하는 사람의 역할을 해야 될 것입니다. 어떤 집에 불이 붙으면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모여든다고 합니다. 그 불을 끄러 오는 사람, 그 불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 그리고 어떤 사람이 오는지 압니까? 불붙는 집에 키질 하러 오는 사람입니다. 어떤 곳에 싸움이 있으면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모여 듭니다. 말리러 오는 사람, 구경하러 오는 사람, 싸움 돋우기 위해서 오는 사람입니다.

나는 어떤 종류에 속합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화해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관청에서도 병원에서도, 요새는 병원에도 싸움이 있는 모양입니다. 학교에서도 경제계에서도, 정계에서도 싸움을 말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화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얼마 전에 여기서 가까운 수원 제암교회에 헌당식을 거행한 것 아마 여러분 들은 분 많으실 줄 생각합니다. 수원 제암교회는 여러분 아시는 대로 벌써 50년 전 3.1 운동 때에 그 악한 일본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그 예배당 속에 다 몰아넣고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불을 질러서 그때 모든 사람을 학살한 그런 참혹한 일이 생긴 곳입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 가운데 예수를 잘 믿는 어떤 사람이 일본 사람 사이에서 돈을, 일본 돈으로 1,000만 원을 모금을 해다가 바로 그 자리에 예배당을 새로 짓고 헌당식을 한 것입니다. 한민족과 일본 민족 사이에 화해의 한 상징인 줄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은 이러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자기가 63살 났을 때에 몸이 좀 괴롭지만 자기가 일찍이 태어난 아이슬레벤(Eisleben)이라고 하는 곳으로 추운 겨울에 요양을 갔습니다. 1월 중에. 그 이유는 거기에 한 귀족이 사는데, 그 귀족이 자기 동생과 무슨 문제로 싸움이 났습니다. 그들은 다 신교를 믿는 사람들인데 교회에 덕이 안 됩니다. 그 두 형제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루터가 가서 여러 날 수고를 해서 결국은 화해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너무 과로를 했던지, 어떤 날 저녁 그 여관에서 갑자기 몸이 괴로워서 그날 저녁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과 화해할 뿐더러 형제 사이의 화해를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화해한 사람들, 하나님과 화해하고 사람과 화해한, 화해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화평해야 하고, 교회는 그 사회 그 지역 사회에서 언제나 화해의 역할을 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라. 서로 피차에 화해하라.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사랑의 근본 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다 죄를 짓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먼저 독생자 주님을 보내시고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고난을 받아서 화해의 길을 열어서 저희들이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권속이 되었사온데 무엇으로 다 감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오늘 여기 모인 우리는 하나하나가 먼저 하나님과 막힌 담을 없애 화해를 하게 해 주시고 형제와 자매간에 또한 화해를 하게 해 주시고, 한 걸음 나아가서 이 분쟁 많은 세상에서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