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그 후에 남궁억이 관직을 그만두고 독립운동에 나섰을 때 그는 하인 부부를 해방시켜 주었으나 그들은 옛정을 못 잊어 그냥 남아 살았다. 그들의 딸이 나중에 자라 어떤 남자를 만나서는 뭉이를 낳았으니 곧 늙은 여종의 외손자인 셈이었다.

남궁억은 뭉이가 스무 살이 되자 돈을 좀 보태 주며 나가서 자유롭게 뜻을 펴며 살라고 권했다. 하지만 뭉이는 그러지 않고 계속 남궁억 옆에 붙어 있겠다고 말했다.

“뭉아,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제부터 너는 완전한 자유인이니 나를 주인 나리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똑같은 사람으로서 대해야 한다.”

남궁억은 그렇게 일렀다. 그러나 뭉이는 하인의 습관을 못 버리고 계속 주인 나리로 대접했다. 남궁억은 호통을 쳤다.

“내 말이 그냥 빈말로 해본 소리 같았느냐? 나는 하인을 두지 않을 테니 당장 떠나거라!”

“잘 알겠습니다. 제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앞으로 가까이에서 어르신으로 모시면서 좋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인과 하인이 아니라 일종의 스승과 제자와 같은 관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뭉이는 머리는 썩 총명한 편이 아니었으나 마음이 순박하고 우직했다. 그리고 힘이 장골이었다. 스승은 제자의 특성을 파악한 후 마음을 잘 계발하여 지혜를 깨우치도록 가르치고 있었다.

길가에 핀 꽃을 바라보던 뭉이가 물었다.

“어르신, 산상수훈에 나오는 백합화 이야기 있잖습니까. 좀 궁금한 점이 있어서요.”

“어떤 것이?”

“마침 꽃도 피어 있고 저기 새도 날아가니, 우선 제가 한번 그 구절을 암송해 보겠습니다.”

“거 좋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더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에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뭉이는 낭독을 마쳤다. 남궁억이 물었다.

“그래, 무엇이 궁금한고?”

“자연 속의 새나 꽃을 보면 예수님 말씀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됨을 알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어르신 덕분으로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있지요.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새나 꽃도 인간에게 목이 잘리고 짓밟힙니다. 인간도 마구 짓밟힙니다! 일본놈들은 조선 사람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잖습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헐벗은 채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뭉이는 제풀에 흥분되어 숨을 몰아쉬었다.

남궁억은 길가에 핀 꽃과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를 한참 동안 묵묵히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우리의 귀중한 정신을 한갓 재물을 모으거나 하찮은 욕심을 채우는 데다 쓰지 말고 참답게 열심히 사는 게 옳다는 뜻이 아닐까?

저 새는 지금 헛된 욕심이나 걱정 없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을까. 그리고 저 꽃은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자신의 씨앗을 틔워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고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군.”

남궁억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물론 현재 일본의 압제 앞에서 누구도 걱정 없이 살 수는 없겠지. 우리가 열심히 일해 모아 놓아도 일본놈들이 다 빼앗가 가 버리니까 말야.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말뜻은, 걱정만 하고 앉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일을 정해 온 심혈을 다 기울여 열심히 하라는 것이 아닐까 싶어. 사실 근심 걱정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보다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좀먹고 오히려 황폐하게 만들어 버리지 않던가?

그러니 맑은 정신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라,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예수님이 도와주시기만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노닥거리라는 얘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겠지.

저 꽃이나 새, 이 조그마한 개미도 예수님께 의타하는 게 아니라 일단은 제 힘으로 부지런히 살고 있지 않나. 어디까지나 자주 독립의 정신이 중요하지, 의타적으로 살아서는 예수님도 아마 싫어하실 거야. 하늘도 스스로 돕는다는 말도 있지 않나 말야.”

“잘 알겠습니다. 명심하고 살겠습니다.”

“일본이 지금은 위세를 떨치며 발악을 하고 있으나 얼마 후면 꼭 망할 것이다.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그건 총칼의 무력에 의한 것이지 내면의 진실한 힘이 아니거든. 저 백합화와는 전혀 반대되는 모습이다.

일본 제국의 속내에는 악이 가득 들어차 있어. 잔인하고 변태적이며 추악한 욕심이 지나쳐 곪아 썩어 들어가고 있단 말야. 그러니 저렇게 날뛰어도 망할 때는 아주 처절하게 단숨에 망하고 말 것이야.

우리는 이 어려운 현실에 굴복하지 말고, 저 백합화처럼 우리 정신으로 우리의 참다운 꿈을 꽃피워 나아가야만 해.”

남궁억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네.”

뭉이는 깊은 감명을 받은 눈빛이었다.

“자,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또 부지런히 가 보세.”

“네.”

두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발길을 옮겼다. 한동안 가다가 들길을 벗어나 산을 하나 넘고는 그 기슭의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저 멀리 맞은편에 홍천강이 푸른 리본처럼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강기슭에 노란 개나리가 무리지어 피어 한 폭의 수채화를 이루었고 버들강아지는 꽃샘바람을 이기고 움터 부드러운 털을 흔들었다.

가까운 산에서 뻐꾸기가 산정(山情)을 머금은 목청으로 뻐꾹 뻐꾹 울었다. 더 깊은 산속 어디쯤에서는 이따금 두견새가 가슴속의 한 서린 피를 토해내는 듯이 서럽디 서럽게 울어댔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