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긴 겨울도 자연의 운행에 의해 가고 봄이 왔다.

헐벗은 산과 들에도 푸른빛이 돌고 멀리 아지랑이가 아른거렸다.

아직 꽃샘추위가 조금 남아 있었으나 강가의 버들가지엔 새움이 트고 산 중턱엔 분홍빛 진달래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논과 밭엔 흰옷 입은 사람들이 점점이 들어서서 향기로운 흙을 뒤집어 씨를 뿌리거나 김을 매었고, 하늘 높이 어디선가 노고지리가 저 홀로 봄기운에 겨워 솟구쳐 날며 비이비이 배배 청아한 소리로 우짖었다.

풀꽃이 흐드러지게 핀 한적한 들길을 한복차림의 한 노인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산들바람이 불어가며 그의 흰 옷자락과 흰 머리 그리고 길고 흰 수염을 휘날렸다. 그 모습은 마치 그림 속에 나오는 신선 같아 보였다.

그는 시끄러운 경성을 떠나 강원도 홍천의 보리울로 가고 있는 남궁억이었다. 바로 뒤에는 한 젊은이가 괴나리봇짐을 멘 채 따르고 있었다.

“뭉아, 내 노래 한 곡조 뽑아 볼까나? 들어 보려니?”

신선 같은 노인이 묻자 젊은이는 대답 대신 싱긋 웃을 뿐이었다. 노인은 목청을 뽑았다.

“먼 산 석양 넘어가고 찬이슬 올 때
구름 사이 호젓한 길 짝을 잃고 멀리 가
짙푸른 하늘에 높이 한 소리 처량타
저 포수의 뭇 총대는 너를 둘러 겨냥해

이 산 저 산 네 집 어디 그 정처 없나
명사십리 강변인가 청초 우거진 호수인가
너 종일 훨훨 애써서 찾되
내 눈앞에 태산준령 희미한 길 만리라….”

남궁억은 노래를 마치곤 먼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금은 봄날인데도 내 마음은 늦가을인 양 스산하기만 하구나.”

그것은 남궁억이 직접 지은 <기러기 노래>라는 시조에 곡을 붙인 것이었다. 보리울이라는 두메산골로 떠날 때 그의 심정은 이러했던 것이다.

짝을 잃은 채 포수들의 총을 피해 갈 곳도 없는데 앞에는 태산준령이 가로막고 있으니 오죽하랴.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목적지인 보리울도 조상의 선영이 있다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 ‘희미한 길’을 찾아가는 기러기 꼴이었다. 보리울이란 예로부터 보리를 많이 심은 데서 붙은 이름이었다.

남궁억이 선향인 보리울(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떠나게 된 건 친구들과 동지들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일본의 압제가 갈수록 모질게 판을 치는 경성을 벗어나 심신을 추스르고 건강을 회복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막상 떠나려니 왠지 마음이 쓸쓸하고 무거웠다.

“어르신, 여기서 좀 쉬었다 가시지요? 많이 힘드실 텐데요.”

뭉이라는 젊은이가 하늘 한가운데 높이 뜬 태양을 바라보곤 말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해 지금까지 계속 왔으니 꽤 많이 걸은 셈이었다.

“그래, 그러자꾸나. 네가 많이 힘들겠다.”

남궁억은 길가의 바윗돌 위에 걸터앉았다. 젊은이가 봇짐을 풀어 찹쌀떡과 물통을 꺼내 놓았다.

두 사람은 별 말없이 요기를 했다. 이름 모를 풀꽃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와 그들의 코끝을 간질렀다. 해맑은 새소리가 귀를 씻어 주었다.

남궁억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곤 예의 그 무궁화가 수놓인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더 드시지요, 어르신.”

“난 되었다. 너나 많이 먹거라.”

젊은이는 마디가 굵은 손으로 떡을 집어 입에 넣었다. 뭉이라는 그 젊은이는 원래 남궁 집안의 하인의 자식이었다.

남궁억의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부리던 여종이 있었다. 그 후 그 여종은 가난한 남궁 집안을 떠나 이웃집에 가서 일을 해주며 살았다.

그러다가 남궁억이 장성하여 관직에 있을 때 다시 남궁 집안으로 돌아와 일했던 것이다. 그때 그 여종에겐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