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새안교회 장시환
▲새안교회 장시환 목사
예수님의 고별설교 중에 한 부분입니다. 십자가를 앞두시고 죽음을 앞두시고 주신 깊은 권면입니다. [요15장] 앞부분에는 그 유명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연합의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붙어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고, 떨어져 있으면 메마르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속에는 우리가 어떡하든지 주님과 꼭 붙어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은혜가운데 풍요롭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초점이 뭔가요. 주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우리 삶의 궁핍과 풍요, 실패와 성공의 모든 것이 결국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떠하냐? 그것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주님은 관계성을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주님과 나와의 관계. 그런데 그 관계가 전환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시대가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란 어떤 관계였습니까. 율법의 시대라는 것은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시대의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대신 말씀하시고 그것을 따라 백성들이 살았습니다. 주인과 종입니다. 명령과 복종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무법천지의 강도의 세상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못하는 가운데 하나님 백성들을 그렇게 옳은 길, 법도를 가르치시고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인데, 은혜의 시대란 어떤 시대인가. 하나님과 인간사이가 친구의 관계입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변화입니다. 여러분 어떤 관계가 좋은 관계입니까. 어떤 관계가 친밀한 관계입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친구 관계입니다. 그 관계성은 어떻게 열릴 수 있는 것인가.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일평생 자기를 비워 죄인을 위해 사시고 이제 생명까지 다 주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은 요한일서에 의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그 사랑이 하나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밝히 드러나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 사랑을 통해서 새로운 관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통해서 안다는 것. 우리가 사람을 볼때 내가 그 사람 '안다' 라고 말합니다. 그 '안다'는 것이 뭘 의미할까요. 무엇을 안다는 것일까요. 이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 요한은 지식인들 헬라인들을 위해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예수가 LOGOS, 진리이신 것을 증거하려고 했습니다. 헬라인들의 사고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이성적인 것입니다. 매우 분석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 이것은 동물과 구별될 수 있는 아주 분명한 기준이 됩니다. 동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댕이라는 사람의 유명한 조각 작품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 이것이 유명해진 것은, 이것이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뚜렷한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늘 모든 것을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따져서 사물을 잘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무엇을 얘기합니까. 이성의 한계를 얘기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따지고 분석해서 '아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사건이 무엇인가요. 동산중앙에 있는 따먹지 말라 한 열매를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맛있는 과일열매를 따먹은 이야기일까요. 영어번역을 보면 정확하게 나와있습니다.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입니다. 그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걸 따먹고 에덴동산을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관계성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 바라시는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믿음안에서 일치된 관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하나된 관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는 그 관계를 깨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인간사이에서도 어떤 경우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까. 정말 믿고 정말 사랑하면 따지지 않습니다. 예전에 초코파이 광고의 유명한 카피가 있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냥 바라보면~" 그러면서 '정(情)' 자가 적힌 초코파이 하나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고 믿으면 말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서로를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깨져버린다 해보십시오. "너 정말 나를 사랑해? 너 다른 사람 만났어? 너 그때 왜 그랬어?" 이렇게 따지고 분석하는 순간, 이미 그 관계는 깨어진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하나님과 인간사이 관계를 얘기하는 책입니다. 다른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이것이 제일 중요한 초점입니다. 믿음안에 사랑안에 일치된 세계가 있었는데 그것이 깨어지게 됨으로 그것을 다시 회복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알량한 이성으로 지식으로 재단하고 판단하려 할때 정말 성경을 더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공부를 아무리 해도 이런 것을 놓치면 진짜 아는게 아닙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여졌는데 히브리어는 매우 깊으면서도 특이한 언어입니다. 가령 '안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이 같은 단어로 쓰여집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남을 안다는 것이 뭘까요. 그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할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는 여러 모양의 관계성이 있습니다. 힘든 관계성, 갈등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관계가 나빠지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런 질문에 "그냥 안보고 살면 되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에 대한 미움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런 질문에 "그럼 당신이 먼저 회개하세요!" 라고 답한다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얼마나 힘들까요. 가령 하나만 예를 들어 생각해봅시다. 윗사람 때문에 힘들다고 해봅시다. 윗사람이 정말 나를 괴롭게 합니다. 요즘 말로 '갑질'을 합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성경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가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그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우상을 팔기까지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게 우상섬기는 거 아닙니까. 십계명 제1,2계명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하는 아버지의 자식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 아버지 속에서 나와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까요. 분명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그것을 보고 닮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우상을 파는 것을 보고서 그는 아버지가 잘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알았지만 저항하고 욕하거나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윗사람이 가지는 권위 권한이 있을테니까요. 그러나 한편으로 같아지지 않으려 몸부림치면서 더욱 하나님을 찾았을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께 가깝게 나아갈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 깊고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갈등하는 관계 힘든 관계의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정말 미운 사람있으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똑같이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내가 도무지 어찌할 수 없으면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아지지 아니하고 나로부터 새롭게 하나님 말씀 따라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정말 잘못된 것을 한다면 그가 정말 악하다면 그럴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다 맡기고, 우린 더욱 선을 좇아가야합니다. 그 과정이 매우 힘들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배우고 깨닫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어떻게 깊어졌는가. 그것은 악처를 두어서 그렇다고 말들 합니다. 인생의 고민이 깊어지면서 깊은 학문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가 더 생각해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친밀한 관계성, 화목한 관계성을 가지고 살자면 상대를 잘 이해해야합니다. "난 저 사람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해라는 말의 영어는 understand 입니다. Under:아래에 Stand:서는 것입니다. 내가 그보다 아래에 서는 것입니다. 즉, 겸손한 것입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그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늘 좋은 관계는 상대의 말을 잘 듣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 입장이 아닌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내가 그를 사랑할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할때 낮아질 수 있습니다. 사랑할때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가 어떻습니까. 아이의 말도 안되는 말도 잘 들어줍니다. 옹알이까지 들어줍니다. 그의 입장에서 배고픈지 피곤한지 최대한 이해하려 합니다.

오늘 본문속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뭘 얘기하시는가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 말씀은 '너희가 나의 사랑을 알았으니' 이런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의 사랑을 알았고 또 더 큰 사랑이 드러나는 순간' 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니까 가장 큰 사랑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너희가 가장 큰 사랑을 볼텐데, 가장 큰 사랑을 알게 될텐데, 너희가 그것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함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만 그를 온전히 알게 되고 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이성,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남을 안다는 것은 매우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심리학으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나요. 통계, 분석된 자료, 오랫동안 연구한 것이니 그것이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알려고 할때 이성이 필요합니다. 그는 이랬으니 이럴 것이고, 그는 이런 습관이 있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분석하고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를 정말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남을 안다는 것은 매우 제한적인 것입니다. 안다고 해도 그것은 어느 한부분만을 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한부분만을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절망합니다. 가까이 있다고 하지만 벽이 있음을 느끼고 가깝다고 하지만 답답함을 느낍니다. 나는 그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때, 깊은 상처가 되기도 하고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갑자기 목숨을 끊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전에도 한 배우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봤습니다. 늘 살아가는 일상이 있습니다. 전날까지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지인들도 그를 안다 생각했겠지만 진짜로 알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진짜로 안다는게 뭘까요.

우리가 많은 관계성속에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틀이나 선입관으로 남을 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도움이 되지만 그러나 충분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도움은 되지만 때론 더 큰 분열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고, 그것으로 안다고는 하지만 더 모르는 세계가 많아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누구는 정말 못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래 그를 알아왔는데 정말 못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는 이런 면에서 못됬고 저런 면에서 못됬고.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정말 귀한 사람입니다. 이런 면이 귀하고 저런 면이 귀하고. 물론 그가 보고 알아왔던 면이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미움이 있으니 다른 면을 전혀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못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이처럼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한쪽을 알면 알수록 다른 쪽이 점점 더 모르게 됩니다다.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놀라운 세계, 축복의 세계, 아름다운 세계는 무엇인가요. 지금 고별의 설교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이 땅에서 주님의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실 말씀이 있다면 지금 다 쏟아내야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듣기 원하는 자가 있으면 이 순간에 다 들어야합니다. 정말로 귀한 말씀이고 듣는 자들은 이 말씀의 깊은 세계를 정말로 깨달아야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시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그 죽음의 의미, 희생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지금 가장 큰 사랑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 사랑을 따라서 우리도 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서로를 진정으로 알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며, 그 사랑으로 화목해서 하나되어서 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사랑의 장이라고 하는 [고전13장]에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고전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서도 마찬가지,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주님을. 하나님을.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알 수 없습니다. 역사속에서 인간은 늘 하나님을 알려고 했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싶었습니다. 왜? 지어진 자는 지으신 분을 알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열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깊은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나를 아신 것같이, 주님이 나를 아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주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멀어진 관계가 있습니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관계의 담, 벽이 있습니까. 어떻게 해도 해결되지 않는 답답한 관계가 있습니까. 먼저 주님의 이 귀한 말씀, 주님의 이 깊은 사랑의 세계를 먼저 알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와 사랑, 죄인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알기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랑으로 형제를 새롭게 바라보고 그 사랑으로 그를 아는, 그래서 그와 진정으로 하나될 수 있는 우리들이 됩시다. 그러면 그리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 그리하면 너희는 진정한 나의 친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