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지금까지 나누었던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보상을 얻기 위해 선(善)을 원하는 것,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선을 원하는 것, 승리만을 위해 선을 원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시간에는 두 마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아주 다양한 형태의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어쩌면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가장 많을 것이다. 선을 원하지만 어느 정도만 원한다. 이런 사람도 두 마음을 품은 자다.

일반적으로 잘못된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자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대다수 사람들은 옳은 길을 가기 원한다. 신문 기사에 여러 사건 사고가 보도되면, 그런 범법자들을 비난하고 똑바로 살아야 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만 선을 원하는 것은 여전히 두 마음이다. 두 마음에 대한 논의를 떠나기 전에 사도의 충고를 다시 한 번 들어보자.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어느 정도만 선을 원하는 두 마음은 수많은 교차로에 서는 것과 같다. 선의 길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길이 교차로를 통해 혼합된다. 그래서 그 마음도 아주 분주하다. 한 물건만을 취급하는 상인이 드물 듯이, 이 두 마음도 그렇다.

이 두 마음은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특별하게 이 마음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도 힘들다. 그 마음 안에서조차 한 마음을 품지 못하고 온갖 풍조에 밀려 요동치기 때문이다(엡 4:14).

사도가 말하듯이, 이런 사람은 배우고 또 배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도 없다.(딤후 3:7) 오히려 이런 사람은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이 혼란스러움을 더욱 부채질하는 교훈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어느 정도만 선을 원하는 두 마음은 논의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만능이다. 온갖 것과 다 닮았고 삶의 흥망성쇠에 따라 계속 달라지기 때문이다.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에 지금 이 이야기가 하나의 징후를 설명하는 중간에도 여러 번 바뀔 수 있다.

색상으로 말하자면, 아주 잡다한 색상을 띤다. 가능한 모든 색상으로 다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색상이 바뀌는 능력이 있는 카멜레온의 능력은 아무 것도 아니다.

색상이 변하는 법칙? 그런 것은 있지도 않다. 속담으로 말하자면,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한다. 전도서에는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전 1:9), 이런 자에게는 언제나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제나 옛날의 두 마음이다!

어느 정도만 선을 원하는 두 마음은 또 다른 특징이 있다. 그것은 언제나 비교를 통해서만, 그 한계 안에서만 자기 자신을 다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두 마음을 적게 품은 자가 됨으로서 구별을 요구한다. 따지고 보면 오십보백보인데,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느 정도만 선을 원하는 두 마음은 언제나 바쁘다. 이 두 마음의 특징은 ‘분주함’이다. 세상은 정신없이 바쁘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라. 참으로 기만적이다. 그토록 삶을 위해 굉장히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바쁘게 움직일지라도, 이 두 마음은 영원은 아주 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을 생각해 보라. 드라마에서 제작진이 시간을 고려해 무대와 배우의 연기를 위해 아무리 많은 것을 준비한다 해도, 영원만큼 이 모든 것을 잘 준비할 수는 없다. 영원은 가장 세심한 부분이든, 무슨 무익한 말이든(마 12:36), 매순간마다 모든 것을 준비해 놓는다.

이 분주함의 힘! 이 힘이 웅성거리며 커져가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 세계를 초연결 사회로 만든다는 4차 산업혁명, 그래서 SNS를 통해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서 친구로 삼는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과는 아무런 연결이 없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분주함이, 이 포식자가 먹잇감을 얻기 위해 덫을 놓는다. 그리하여 아이와 젊은이는 고요, 은둔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영원은 이곳에서만 거룩한 성장을 이룬다.

메아리가 숲 속에 살고 있듯, 고요가 사막에 살고 있듯, 두 마음은 분주함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만 선을 품은 자는 두 마음을 품은 것이요, 분열된 마음이요, 산만한 마음이다. 이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바탕에 무엇이 있는지 설명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분주함에는 한 가지를 품기 위해 자신을 이해하거나 자신 안에 있는 불명확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명확성을 확보할 만한 어떤 시간도, 고요도 없다.

분주함 중에는, 점점 더 멀리 간다. 시끄러운 소리 중에는, 진실한 것이 점점 더 많이 잊힌다. 저 잡다한 환경과 자극들과 방해물들로 인해, 더 깊은 자기 지식을 얻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해진다.

거울은 사람이 그 속에 비친 자신의 상을 볼 수 있는 특징이 있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 성급하게 서두른다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약 사람이 꺼내지 못하는 거울을 지니고 있다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바쁜 사람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으나 서둘러 앞으로 가고 있다면, 계속 달리고 있다면, 결코 이해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거울이 있다는 것조차 점점 더 잊히게 될 테니까. 마찬가지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잊힐 테니까.

이창우 목사
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