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먼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세찬 눈보라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희미한 길을 헤쳐 걸어온 느낌이었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면서도 다시 일어서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건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를 벗어나 더 큰 목표를 위해 옳게 살아갈 때 나오게 되는 에너지 덕분이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분투하는 동지들의 원호와 선배들의 격려가 모여 하나의 큰 강을 이루는 것이다.

목표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조각배를 타고 그 강물을 지나 거친 바다 위를 떠 가더라도 고달픈 줄 몰랐다.

남궁억 교사가 배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지도 어언 8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의 횡포는 극에 달한 상태였다. 강제로 남의 땅을 빼앗아 다스리려고 하니 총칼을 앞세워 발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 밀정을 풀어 일거수일투족 빈틈없이 감시를 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즉시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총독부는 마침내 조선감옥령을 공포했다. 경성을 비롯하여 삼천리 방방곡곡에 감옥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아무 죄 없는 사람까지도 자기들 눈에 거슬리면 쥐새끼 잡듯 붙잡아 감옥 속에 처넣어 버렸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교에도 일본 군인과 경찰의 더러운 군화발이 마구 드나들었다. 총칼을 번득이면서. 교사들은 성깔 사나운 그들의 쌍욕을 얻어먹기가 일쑤였다.

아무리 대담한 남궁억이라도 일본 경찰의 철통같은 감시와 압제를 피해 우리 말과 역사를 제대로 가르칠 방도가 없었다. 거짓으로 미화된 일본의 역사와 말글을 울며 겨자 먹듯 가르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또한 일본은 남궁억 같은 강직한 애국지사를 회유하여 자기네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공작을 펼치며 괴롭히는 것이었다. 만일 남궁억 같은 애국지사를 한 사람 끌어들이면 수많은 국민을 일본에 동조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여러 명의 유명한 조선 사람들을 온갖 위협이나 감언이설로 끌어들여 자기들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을 화려하게 선전하는 데 써먹었다.

“오, 지혜롭고 사랑 깊으신 예수님,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옵소서!”

남궁억은 학교의 예배실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는 오래도록 묵상에 잠겼다.

어떤 큰 문제에 부닥쳤을 때 자신의 좁은 머리로 애써 해답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머릿속과 마음 속을 텅 비운 채 우주 창조주의 지혜를 받는 것이 옳다는 것을 그는 이미 체험하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에 종교교회에서 본처 전도사로 임명되었는데, 기도에 대한 그런 생각을 교인들 앞에서 피력하기도 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꾸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만 하면 마음속이 욕심으로 꽉 차서 정작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기보다 마음을 텅 비우고 우리의 참다운 소망을 순수하게 하나님께 맡길 때 더욱 더 좋은 것을 받게 된다고 봅니다.”

교인들은 그의 말대로 기도해 보고 나서 신기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 시간이나 지난 후 남궁억은 예배실을 나왔다. 들어갈 때와는 달리 근심이 좀 걷힌 얼굴이었다.

겨울방학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어느 날이었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이제 며칠 후면 1918년 무오년도 저물 것이었다.교실 창밖에서는 찬바람이 윙윙 불어대고 있었다.

남궁억 교사는 교실로 들어서자 교과서를 교탁 위에 놓은 채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학생들도 선생의 기분을 감지했는지 재잘대지 않고 조용했다.

얼마 후에 남궁억 교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내가 시를 한 편 읊을테니 음미하면서 들어 보기 바랍니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입니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나서 낭랑하게 읊기 시작했다.

“청춘이란 인생의 일정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장미빛 볼,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열정을 뜻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성한 정신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한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뜻한다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

나이를 먹어 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꿈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고뇌, 공포, 실망 때문에 기운이 먼지 속으로 사라질 때
비로소 마음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예순 살이든 열여섯 살이든 인간의 가슴에는
경이로움에 이끌리는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인생에 대한 즐거움과 환희가 있다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마음 한가운데 안테나가 있다
인간과 하느님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기쁨, 용기,
그리고 힘의 영감을 받는 한 그대는 젊다

그러나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싸늘한 냉소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스무 살이라도 인간은 늙는다
머리를 높이 쳐들고 희망의 물결을 타고 가는 한
여든 살이라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인 것이다.”

남궁억은 낭독을 마치고도 그대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남궁억은 학생들 쪽으로 돌아서서 말했다.
“이 세상에는 뜨거운 열정을 가슴에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암흑천지이지만 그렇다고 어두운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가슴 속에 열정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합니다.

열정을 지닌 채 산다는 건 늘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스스로 실천함을 뜻합니다. 오늘날의 현실이 어둡더라도 실의에 빠지거나 게으르지 말고, 별처럼 빛을 내며 스스로의 성좌를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산다는 게 얼마나 귀중한지 인식해야 합니다. 청춘은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닦아 나가는 자의 것입니다.”

남궁억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남궁억은 잠시 말을 멈추곤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숙연한 침묵이 흘렀다. 학생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청춘의 밝은 빛은 자기만의 욕심을 위한 것이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타인을 도와주고 우리의 공통적인 어둠을 밝히는 횃불로 타오를 때 가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둠 속에서 청춘의 별빛과 열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자신을 갈고 닦아 사회에 나갈 때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야 밝히지만 이 시간을 끝으로 여러분과 나는 헤어져야 합니다.

나의 이 말은 여러분에게 주는 마지막 말이 될지도 모릅니다.”

조용하던 교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남궁억 선생은 차분하면서도 또렷이 말을 이었다.

“청춘은 말 그대로 푸른 봄입니다. 이 겨울이 지나면 곧 봄이 올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새 봄의 시대를 열어가야만 합니다. 청춘은 열정과 희망의 다른 이름임을 잊지 말고, 이 시대의 햇빛과 별빛이 되어 열심히 살아가길 우리 함께 약속합시다!”

수런거리던 교실 안엔 왠지 문득 숨소리마저 끊긴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이어 박수 소리가 하나둘 터져 나왔다. 그것은 점점 커져 교실을 채웠다. 감동이기도 하고 약속한다는 표시이기도 한 박수였다. 말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남궁억 스스로 나이를 떠나 제자들과 어울리며 그렇게 살았듯이, 스승의 깨어 있는 열정이야말로 원숙한 청춘의 본보기가 되어 주었었다.

이윽고 박수 소리에 섞여 흐느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흐느낌은 곧 울음으로 바뀌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들의 흐느낌은 잔물결처럼 퍼져 나가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다.

남궁억 교사도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눌렀다. 그 하얀 손수건엔 고운 무궁화 무늬가 수놓여 있었다. 지난번에 어떤 학생이 선물해 준 것이었다.

학생들도 손수건을 꺼내 쉼없이 흐느끼며 눈물을 닦았다. 모두의 마음도 흰 손수건의 고운 무궁화도 작별의 설움으로 젖어들었다.

“선생님, 가지 마세요! 제발요. 갑자기 가신다면 저희들은 어떡해요.”

한 학생이 책상에서 얼굴을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입을 모아 소리쳤다.

“선생님, 가시지 마세요! 우리들의 영원한 선생님!”

남궁억은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학생들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매서운 현실은 그런 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심신은 알게 모르게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예전에 경무청 감옥에서 받은 고문 탓도 있었지만, 그동안 일신을 돌보지 않은 채 교육과 나라를 위한 일에 심혈을 쏟다 보니 휴식이 많이 필요한 상태였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