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사람들은 하나님은 어디든 안 계신 곳은 없다는 의미로 소위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을 말한다. 그들은 손만 뻗치면 닿는 곳에 언제나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며 하나님과의 친근함을 과시한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도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7-10)”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들의 주장대로 하나님이 분별없이 모든 사람들과 어우러진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를 향해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고 하신 분이 죄인들과 섞일 수 없다.

그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히 7:26)”이시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늘을 우러르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라고 하신 것은 그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죄인과 구별되이 높이 계시는 분임을 의미했다.

하나님이 어디든 안 계신 곳이 없다는 하나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는 피조물에 대한 그의 통치와 영향력이 안 미치는 곳이 없다는 뜻이지, 죄인들과 무분별하게 섞이는 하나님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음 구절은 거기에 대한 부연(敷衍) 설명이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7-28).“ 인간의 생명과 호흡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돼 있다는 뜻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친근한 하나님(A friendly God)’을 표방하면서, 하나님은 그를 가까이 하려는 자에게 어떤 제한도 두지 않는 분임을 강조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억지로 끌어 붙이려고 안달이다. 자유주의자,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그들이다.

한술 더 떠 범재신론적 신학(Panentheistic Theology: Wolfhart Pannenberg, Jurgen Moltmann)을 가진 이들은 모든 인간, 사물 안에 하나님이 깃들어 있어 둘을 분리할 수 없을 정도라며 사람과 친근한 하나님을 역설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공허한 외침에 불가하다. 그런 궤변에 설득당했다고 하나님과 죄인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 사람들은 하나님은 쉽게 만나지는 분이 아님을 확인하곤(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이들도 사실은 짝퉁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결과를 맞는다.

이는 그러한 실망이 하나님 조우(遭遇, encounter)에 대한 기대도, 그것의 유일 통로인 예수 믿음 마저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왜곡된 신학의 무서운 폐해이다.

반대로 하나님 조우는 아예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고 극소수의 특별한 사람들, 예컨대 초인적(超人的)인 하나님 탐구력과 경건 열망을 가진 이들에게만 허락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을 통과한 후에라야 비로소 하나님의 빛을 만날 수 있다고 한 ‘십자가의 요한(Saint John of the Cross, 1542-1591)’, 율법의 정죄를 받아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왜곡된 ‘몽학선생론(갈 3:24, 혹은 극단적 준비신학론)’을 주장한 일부 청교도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조장한 ‘영적 카스트(spiritual caste)’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나 그리스도께로 갈 수 없다는 곡해를 낳아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막는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다(요 8:21)”라고 하신 말씀도 흔히 왜곡되는 성경 구절 중 하나이다.

이는 예수님이 숨바꼭질하듯 사람들에게 자신을 꽁꽁 숨기다가 천신만고(千辛萬苦)한 탐구자들에 의해 어쩌다 찾아진다거나, 혹은 그를 찾다가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숨박꼭질하시는 분도 아니고, 스무고개 하듯 제시된 문항을 적중시킨 자들만 만나시는 그런 인색한 분도 아니다.

이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다른 그리스도를 찾다가 예수의 사죄를 못 받거나 혹은 예수님을 육신적으로만 알 뿐, 그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알지 못해 죽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난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 조우(遭遇, encounter)가 순전히 하나님 마음에 달려 있기에 인간이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며, 로또(Lotto) 맞듯 그의 신앙이 운좋게 하나님의 취향에 부합되면 만나진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다음의 구절들을 즐겨 인용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롬 10:20)”.

그러나 주지하듯이,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예정에 근거한 구원 경륜을 말한 것이지, 그들 말대로 무일관성과 우연성에 기초한 변덕스런 하나님 조우를 말한 것이 아니다.

앞서 잠시 인용했던 ‘하나님은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자. 이는 하나님은 너무 깔끔하여 더러운 죄인의 접근을 차단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내어주실 정도로 죄인을 사랑하셨고, 그 희생의 긍극적인 목적도 인간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Immanuel, 마 1:23)을 위함이었다.

죄인들과의 분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하므로 그의 불에 소멸하지 않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고육지책이다. ‘웃사(Uzza)’가 하나님을 위해 언약궤를 건사하려다 죽은 사실은(삼하 6:6-7),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죄인과 거리를 두시는 것은 죄인에 대한 냉담함의 표현도 아니고, 자기의 권위나 줏가 상승을 노린 신비주의 전법을 구사한 것도 아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긍휼이며(히 8:12), “원하는 자는 누구나 오라(요 7:37, 계 22:17)”가 일관된 태도이시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은 죄 때문에 그를 내치는 법은 없다.

다음의 찬송 가사도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담고있다. “언약하신대로 이룰 것이니 아무나 그 언약 받을 수 있네 받는 사람에게 생명이로다 어느 누구나 오라. 어느 누구나 주께 나오라 어서 와서 주의 말씀 들으라 하늘 아버지가 오라 하시니 어느 누구나 오라(찬 257장).”

다만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조우하면 그의 거룩한 불에 소멸될까봐 그들을 만날 한 곳을 지정하시고, 그곳 외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곳이 성전이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죄인을 얼마든지 만나주신다.

그러나 그 성전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모습을 달리했다. 구약 시대에는 그것이 지성소(Holy of Holies, 至聖所)의 속죄소(the mercy seat)였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

신약 시대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었다. 그에게 가는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0-21)”.

이 언약은 영원히 유효하다. 지금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성전이시다. 그리고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모신 성도는 그 자신이 성전화(聖殿化)되어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그리고 이방인들은 성전이며 복음의 제사장(롬 15:16) 된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했다.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 하나님(히 7:26)’이라는 말은 죄인을 보존하기 위해 따로 지정한 한 곳, ‘그리스도 안에서만 만나지는 하나님’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을 두고 ‘어디든 계시며 아무데도 안 계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