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난 죽음이 두려워 거짓말을 하진 않는다.”

그와 동시에 쇠꼬챙이가 그의 사타구니께로 갔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붉게 단 쇠꼬챙이는 고환에 닿아 있었다. 정녕 야만스럽고 지독한 고문이었다.

그래도 남궁억은 이빨을 굳게 다물 뿐 굴복하지 않았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방울방울 맺혔다가 흘러내렸다. 남궁억은 얼마 후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경무청에서는 온갖 악독한 고문을 했지만 혐의를 밝혀내지 못하자 4개월 만에 남궁억을 석방했다.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출옥한 뒤 남궁억은 황성신문을 동지인 장지연에게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한동안이라도 쉬며 심신을 추슬러야 했다.

남궁억은 편집실에서 장지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여보게, 자네만 믿겠네.”

“한서, 염려 말고 몸조리나 잘 하시게나.”

장지연도 남궁억의 손을 꼭 잡으며 대답했다.

그 후에도 황성신문은 남궁억의 창간정신을 계승하여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 언론으로서의 임무를 다해 나갔다.

일본은 러일전쟁 초기에 중립을 선언한 한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전쟁을 유리하게 진행시키고 한국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황성신문은 이를 사실대로 보도했다가 기사를 삭제당했다.

그러나 황성신문은 저항정신을 버리지 않았다. 국민들에게 일본의 탄압을 상징적으로 전하기 위해, 활자를 거꾸로 놓고 인쇄한 이른바 ‘벽돌신문’을 발행하여 배포했던 것이다. 활자의 뒤쪽 평평한 모습만 인쇄되어 마치 벽돌처럼 보였다. 비록 글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국민들은 그 속에 숨은 뜻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월남 이상재가 남궁억의 집을 방문했다.

좀 여위고 꼬장꼬장한 모습이지만 늘 꾸밈없는 미소를 잃지 않는 어른이었다.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제가 찾아 뵈어야 하는데 이렇게 몸소 오셨군요.”

“누가 먼저 오면 어떻겠나. 뭐 이건 내가 자네보다 더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나, 허허. 건강한 사람이 먼저 발걸음을 해야지. 그나저나 자네가 어서 건강을 되찾아야만 우리 대한의 국민들과 삼천리 강토도 힘을 얻을텐데 말이야. 자네가 이러고 있으니 하늘의 햇님도 왠지 빛이 약해진 느낌이야. 나도 그렇고 말야.”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걱정을 끼쳐 송구스럽습니다.”

“송구스럽다니, 이게 어디 자네 잘못이던가. 간악한 일본 놈들의 행패 때문이지!”

이상재의 긴 수염이 짐짓 파르르 떨었다. 솔직담백한 그의 성품이 그 떨림에 서려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독립협회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다. 청렴결백하고 자상한 월남 선생은 협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젊은 동지들을 잘 이끌었다.

특히 대쪽같이 곧은 성품에 뛰어난 실무 능력까지 갖춘 남궁억을 좋아하고 아꼈다. 마치 동생이나 제자처럼 허물없이 대하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남궁억도 또한 그런 월남 선생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따랐다. 월남 선생은 남궁억이라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갈고 다듬어 미래의 훌륭한 민족 지도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스승이면서 또한 지친 마음을 기대고 쉴 수 있는 푸근한 안식처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성격이 소탈한 월남 선생은 열 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권위의식을 보이지 않고 남궁억을 든든한 벗이자 동지로 대하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남궁억이 야간학교에서 젊은 학생들과 어울려 유쾌하게 놀고 있는 모양을 본 월남이 말했다.

“여보게, 자네는 어쩐 일인지 늘 홍안백발(紅顔白髮 : 머리는 하얗게 세었으나 얼굴은 붉게 윤기가 돈다는 말)이니 아마도 백 살은 넘게 살 듯 하네 그려.”

그러자 남궁억은 맞장구를 쳤다.

“제가 늙은 티를 내면 청소년들이 함께 놀려고 하겠습니까. 노는 마당에 나이 차이가 뭐 있겠습니까?”

“그럼 나도 좀 섞여서 놀면 안 될까?”

두 사람은 흰 수염을 저녁바람에 휘날리며 껄껄 웃었다.

그런 추억이 엊그제의 일인 것만 같은데, 남궁억은 지금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얼굴이 초췌하고 창백해져서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했다.

“여보게 한서, 어서 튼튼해져서 우리 함께 남산에도 오르고 젊은이들과 어울려 공놀이도 하세나.”

이상재가 말했다. 그도 역시 일본 경찰에 끌려가 감옥에서 고생한 적이 있었다. 일찍이 그는 독립협회 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갖은 치욕을 당한 뒤 석방되었다.

그 후 독립협회가 일본의 탄압으로 해산되자 이상재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조정에 뿌리박은 기생충 같은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하였다. 그 때문에 대신들의 미움을 받은 그는 혁명을 모의했다는 이른바 개혁당(改革黨)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구금되었다. 3년에 걸쳐 감옥에서 복역하는 동안 그는 성경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기독교에 입교했다.

‘칼에 칼로 맞서면 온 세상에 피만 흐를 뿐이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압제를 무척 미워했지만, 칼로 맞서기보다는 진리를 국민들에게 교육하고 스스로 직접 실천함으로써 대항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상재는 감옥에서 석방된 뒤 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하여 교육부장으로서 민중 계몽에 온 힘을 쏟았다.

“지혜를 깨쳐라, 믿음을 지녀라, 희망을 잃지 마라!”

이런 세 가지 가르침을 내걸고 청소년 교육에도 마음을 기울였다.

이상재는 유머를 잘 구사했다. 어느 날 기독교청년회에서 강연을 할 때였다. 문득 자리에 일본 형사들이 쫙 깔려 있는 것을 눈치챈 그는 갑자기 먼 산을 바라보며 소리를 쳤다.

“허허, 때 아닌 개나리꽃이 왜 저렇게 많이 피었는가?”

그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 형사를 개, 순경을 나리라고 불렀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번져 나갔다. 일본 형사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 말았다.

또한 매국노 이완용이 창설한 조선미술협회의 발대식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와 송병준이 참석한 가운데 이런 말을 했다.

“대감들은 동경에 가서 사시는 게 어떨까 싶소. 대감들은 나라를 망치는 데는 천재이니 동경으로 이사가면 일본도 망하게 될 테니 말이오.”

낯두꺼운 그들도 아마 속으로는 움찔했을 것이다.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서산마루에는 붉디붉은 노을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던 월남 선생이 입을 열었다.

“여보게 한서, 고난의 길만 찾아다닌 것을 보면 우린 아마 같은 운명을 타고난 듯하군. 이제 나 같은 늙은 고물이야 별 쓸모가 없겠지만, 자네 같은 인재야말로 앞으로 더욱 더 이 나라가 필요로 하는 일이 많을 테니 건강에 특히 유의하게나.”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동안 몸져누워 있어 보니 몸이 감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궁억이 차분히 말했다.

“옛말에 이런 게 있지. 바깥에 우환이 있는 건 지엽적이지만, 안에 우환이 있는 건 근원적인 병이라고 말야. 훌훌 털고 일어나세 그려.”

“잘 알겠습니다.”

“그럼 내 또 옴세. 잘 지내게.”

“네, 다음엔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남궁억의 얼굴은 아까보다 혈색이 돌았다.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는 월남 선생과 얘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희망이 솟았던 것이다.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