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 기생충
영화 <기생충>이 프랑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국내에서도 관객 수 500만명을 돌파했습니다. ‘기독교에 살을 날린 영화’ <곡성> 리뷰로 큰 화제를 모은 이영진 교수님(호서대)이 이번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분석해 주셨습니다.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소 들어 있습니다. -편집자 주

이 영화의 지배 윤리는 ‘선을 넘지 말라’는 금제에 대한 극혐이다. 즉 ‘선을 넘어라’인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영화 자체가 큰 수작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부터 <기생충>에 나타난 봉준호의 세계관을 원하는 대로 ‘선을 넘어서’ 열어 보여드리겠다.

기생충
▲영화 <기생충>의 기득권층인 박 사장 부부(이선균, 조여정 분).
1. 봉준호의 포르노그라피

통상 범주론에 있어 동양적 세계관을 시간-역사적 범주(temporal-historical categories)라 하고 서구의 세계관은 공간-수직적 범주(spatial-vertical categories)라고들 하는데, 봉준호의 포르노그라피는 이 두 개가 엉겨 붙어 있다.

왜 그럴까. 흔히 서양의 에로티시즘은 형체(shape)와 면적이 충분해서 그런지 운동력으로 자극을 하는 반면, 공간적으로나 면적으로나 그렇지 못한 동양의 에로티시즘은 평면적일 뿐 아니라, 그래서 관계성에 호소하여 자극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일본이다. 공간적이거나 운동력에 호소하기보다는 관계나 심리의 설정을 통한 독자의 연상을 자극한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에서 보여준 봉준호의 포르노그라피는 미제와 일제 중에, ‘일제’라 할 수 있다. 옷을 한 장도 벗지 않는데도 관객들이 가족과 못 볼 영화라며 투덜대기 때문이다.

이런 동급의 영화를 무명의 포르노 감독이 만들었다면 15세 관람가를 얻었을까? 그것은 동종 산업 종사자에게 물을 일이다. 아마 이 영화가 미제를 타도하는 영화라는 점이 관료나 권력 실세들을 매료시켰을 법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포르노그라피는 꽤 공간적이라는 점에서는 미제이기도 하다. 관객은 저속하다면서도 “시계방향으로 돌려”라는 여배우의 음성을 잊지를 못하는데, 아무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려주는 이가 없다. 제가 알려드리겠다.

칸 영화제 기생충
2. 봉준호의 계급주의

나는 이 영화를 보다 소독 가스 씬을 보고는 ‘봉준호는 소독 가스 패티쉬인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괴물>에서도 소독차 소독 가스를 전신에 씌우더니 이 영화에서도 소독차 가스가 온 사방을 덮어씌운다.

소독차 소독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아마 현실 속의 가난한 사람들의 상징으로 들여온 것 같다. 부자들은 높은 곳에 살기에 태양과 가깝고, 가난한 자들은 낮은 곳에 살기에 습윤과 거기에 기생하는 벌레들에 더 노출되기에 소독차의 가스는 마치 벌레와 동급이 된 듯하게 보이려는 매개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지하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 관객에게는 이 대목이 어떨까. 영화가 이해를 해주니 참 감사할까? 아니면 뭔가 희망을 주는 영화이기에 감사할까?

어떠한 공감도 희망도 제시 못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봉준호의 세계관은 계급론에 있어서도 ‘포르노’다. 매우 잔인하다. 그런데 이 반지하가 가장 하층인 줄 알았더니, 한 단계가 더 있다.

생각 없는 평론가들은 설국열차의 수평 구조 계급이 수직적으로 되살아났다고 입에 침이 마르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감독의 세계관에 고착화된 포르노급 계급주의일 뿐이다. “시계방향으로 돌려”야만 열리는 위대한 예술적인 저택의 지하는, 여성의 신체를 은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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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봉준호의 물질관

비굴하고 구차하고 아무 계획도 없이 사는 가난한 가장이 이르기를 “부자들은 착해 보인다”고 하자, 바로 이 때, 몰상식하고 상스러운 가난한 아내가 이르기를,
“아니야! 부.자.니.까. 착.한.거.야!”
“부자들은 구김살이 없어. 착하니까.”

이 아내의 말은 진리이다.
“부자니까, 착하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은 착하고 싶어도 착할 수가 없다. 거리에서 인사를 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은 인사를 할 겨를이 없다. 겨를이 없으므로 마음에서도 멀어져 착함이 떠나간다.

이것을 극복하고 착함을 다시금 있는 힘껏 끌어올리려면, 그 근원은 오로지 정신소(所)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 가난한 자들이 내뱉는 지복(至福)의 세계는 고작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인 것이다.

그러나 봉준호에게는 물질이 모든 착함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물질이 있어야 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로 우리가 체험하는 진리이지만, 유물론적 진리이다.

그래서 반지하방에서(또는 그 이하에서) 사는 사람들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어 착해질 수 있는 돈을 벌었지만, 저 모든 반지하방의 사람들을 꺼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유물론 자체가 상부구조를 무너뜨려 하부구조를 착취하는 기생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생충>의 물질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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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봉준호의 트라우마

<기생충>의 산수경석(山水景石)은 이 영화에 있어 아무런 역할도 못하는 ‘심볼’이다. 이 산수경석의 주인이 육사(육군사관학교) 시절부터 애지중지 하던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관객들이 다소 좀 뿜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사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시절이면 대담한 기호 역할을 해줬겠지만, 지금 저런 대사를 듣자니 “봉준호도 한물 가나…” 하는 생각이 불현 듯 스칠 수밖에 없다.

이 기호로 뭔가 스토리의 뒷정리를 해주려 한 것 같은데, 이 영화가 벌여만 놓고 뒷정리가 안 된 것은, 저 산수경석이 이야기의 주된 기호라기보다는 감독의 트라우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고로 포이에티케(Poietike)에서는 말하기를 ‘스토리에서 있으나 마나 한 것은 없어도 되는 것’이라 하였다. 젊은 친구들에게 육사에서 비롯된 산수경석을 애지중지하다간 뒤통수 깨진다는 교시를 하는 신파인가? 애들 웃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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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봉준호의 기업관

봉준호의 기업관은 편중되어 있다. 유물론이면 사실 철저히 자본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부자이기 때문에 착한 사장, 박 사장님은 글로벌 IT기업의 자수성가한 젊은 사장으로 나온다.

배역들은 이 부자 가정에 큰 감정이 없다. 오히려 감사해 한다. 그런데 결국에는 큰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은 사람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계급을 가져오는 사회구조를 미워하라는 암시인 것 같다.

배역들에게는 부자 증오가 없지만 영화만이 부자 증오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다른 말로 하면 봉준호의 유물론과 계급주의를 토대로 한 기업에 대한 가치관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부자가 어떤 아이템을 다루는지까지 영화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제품 또는 통신기기…, 어떤 기업을 특정지으려 한 것일까. 영화 <곡성>의 나홍진은 특별히 삼성 카메라를 특정한 바 있지만, 봉준호는 그런 담력도 없는 것 같다.

부자에게 감사를 해야 한다는 심정과 냄새를 참지 못하는 부자에 대한 적개심의 양가적 분열 속에서, 그 기업이 누구를 특정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적어도 봉준호의 악덕 기업 목록에 외식업, 엔터테인먼트, 드라마 제작, 영화관 운영업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봉준호가 제조업을 특별히 싫어하지 않는 한, CJ의 업종을 떠올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이라는 플롯은 실사 같기만 하다.

이렇다 할 제조업이 없는 CJ 컴플렉스…, 아니다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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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봉준호의 패착(敗着), 반미(反美)

봉준호는 이 영화에서, 산수경석(山水景石)을 애지중지하던 젊은 세대는 뒤통수가 깨지고, 영어를 섞어 쓰는 부자는 미국식 파티를 열고 미국 원주민 인디언 놀이를 하다 결국 인디언에게 유혈 봉변을 당해 잔혹 파티로 끝을 맺는다는 교훈을 스펙터클(spectacle)하게 마무리하려 한 것 같다.

이런 아류식 클리셰의 꾸밈새를 보면서, 게다가 이런 마무리가 무슨 학익진(鶴翼陣)이라는 (어떡하지) 대목에서…, ‘아, 이제 봉준호도 50대에 들어서는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반일(反日)을 외치는 일제 포르노그라피 키즈, 계급에 기생하는 반(反) 계급주의자, 육사 콤플렉스, 제조업만 골라 패는 매국적 기업관, 이런 ‘기생충’들이 근절되어야 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 <기생충>.

한 줄 평: 계급에 기생하는 계급주의 영화
별점: ★★☆☆☆

YOUNG JIN LEE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