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정치적 측면뿐 아니라 조선 사회 전 영역에 영향
준비 단계부터 기독교 세력이 절대적으로 우세
후속 단계인 임시정부 수립 역시 기독교가 중심

제6회 대학총장포럼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제6회 대학총장포럼(이사장 김양재 목사, 회장 정상운 박사)이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10일 오후 성남 우리들교회 판교채플에서 개최됐다.

포럼 개회예배에서는 김선배 총장(침신대)의 기도 후 이사장 김양재 목사(우리들교회)가 ‘응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왕상 18:30-40)’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기독교 신앙이란, 이 세상 원수 마귀와의 전투와 다름 없다.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류의 역사가 영적 전쟁”이라며 “본문의 엘리야 선지자도 갈멜산에서 생명을 내놓고 바알 선지자들과의 치열한 대결에 임했다”고 말했다.

김양재 목사는 “100년 전 일제 치하에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3·1운동도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내놓고 아합에게 간 엘리야처럼, 믿음의 선조들도 목숨을 내어놓고 대한민국 독립을 외쳤다”며 “한민족의 수치이자 기근이었던 한일합방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남은 자가 되어 헌신했기에 나라와 믿음을 견고히 지킬 수 있었다”고 전했다.

제6회 대학총장포럼
▲김양재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김 목사는 “고난을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축복도 해석할 수 없다. 3·1운동의 의미도 성경적 관점으로 해석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주신 축복도 해석할 수 없다”며 “우리는 믿음의 선조들의 유업을 지키기 위해 무너진 예배를 회복시키고, 더 힘든 길을 택하는 적용을 해야 하며, 말씀으로 회게케 하는 기도를 해야 하면, 불로 하나님 되심을 보이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엘리야는 이세벨과 아합을 끝까지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한 그의 삶은 성경에 기록되어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다”며 “사도 바울도 자식이 없었지만, 그의 삶은 수많은 사람을 지금도 변화시키고 있다. 오늘 포럼 발표들 또한 한국교회를 변화시키는데 귀하게 쓰임받기를 간절히 기도한다”고 정리했다.

예배에서는 주대준 전 총장(선린대)이 ‘한국 사회와 국가를 위해’, 최문자 전 총장(협성대)이 ‘한국교회를 위해’, 김영만 전 총장(전주비전대)이 ‘한국 대학을 위해’, 최대해 총장(대신대)이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대표기도했으며, 김근수 총장(칼빈대)이 축도했다.

포럼에서는 정일웅 전 총장(총신대)을 좌장으로 회장 정상운 전 총장(성결대)의 인사 및 공로패 수여 후 발제와 논찬이 진행됐다.

제6회 대학총장포럼
▲정상운 회장이 인사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회장 정상운 박사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를 맞아, 포럼을 통해 3·1운동 100주년이 현 한국에 가져다 주는 역할과 사명을 모색하고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고 인사했다.

◈3·1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이사장 김양재 목사는 대학총장포럼 1·2대 회장을 역임한 정일웅 전 총장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이후 이상규 박사(백석대 석좌교수)가 ‘3·1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를 발표했다.

이상규 박사는 “1919년 삼일운동은 한국인들이 거족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으로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정되고 있다”며 “한국인들은 신분과 직업, 계급과 지역, 종교를 초월해 대동단결해 일어났고, 한국인이 근대 민족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또 한민족의 주체적 독립 쟁취에 대한 자신감을 부여,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의 지속적 원동력이 되고 세계인들에게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역량을 알리는 기회가 됐다”고 평가했다.

이 박사는 “삼일운동 발발에 끼친 주 영향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상반된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일반적 견해는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으로, 국제정세나 국외 요인이 만세운동에 주효한 영향을 줬다는 외인론(外因論)”이라며 “반면 국제정세에 무지한 당시 상황에서, 민족자결론 하나에 매달려 거사를 준비했다고 보는 것은 부당하며 도리어 일제의 심각한 탄압과 폭정이 주 원인이었다는 내인론(內因論)도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3·1운동을 민족사적 주체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 있으나, 국제정세를 고려하지 않고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 사건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연쇄적 관계를 형성하기에, 시대정신이나 그 시대 상황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따라서 양 입장을 배타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상호보완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제6회 대학총장포럼
▲포럼이 진행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일웅 박사, 이상규 박사, 박명수 박사, 김형석 박사. ⓒ이대웅 기자

이상규 박사는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민족자결주의가 만세운동의 점화 과정에서 영향을 끼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대부분의 민족 지도자들이 민족자결주의를 알고 있었고, 천도교계 인물들과 기독교계 인사들도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동기가 됐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라며 “물론 그뿐 아니라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폭정과 박해에 대해 누적된 불만도 상호 연쇄하여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외인론과 내인론은 상호작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박사는 “3·1운동은 정치적 측면뿐 아니라 조선 사회 전 영역에 영향을 끼쳤는데, 이 점이 그간 간과돼 왔다”며 “먼저 3·1운동 결과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전까지 여성은 거리를 다니거나 학교에 가기 위해 대문을 나설 때조차 주저해야 했으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시위에 가담한 일은 전통적 여성상을 파괴하는 커다란 변화였고, 사회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배움에 대한 열망이 고조돼 학교 취학율과 진학율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근대화 교육을 강조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서양 근대문명의 적극적 수용을 주장했던 개화지향적 인사들이었고, 1920년대 문화운동, 신문화건설 혹은 실력양성론으로 발전했다”며 “이 외에 신분 타파 운동에도 영향을 주게 돼 새로운 민족의식이 고양되고 국민의식이 변화를 가져왔다”고 했다.

이상규 박사는 “3·1운동의 중심 세력이 천도교인가 기독교인가도 논란의 중심에 있다. 천도교 측은 기독교를 종속적 관계에서 해석하는 반면, 기독교계는 기독교의 기여와 역할을 중시한다”며 “기독교계는 1918년 9월 선천에서 개최된 장로교 총회에서 세계정세를 청취했고, 서울에서는 YMCA를 중심으로 별도의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등 기독교계가 시간적으로 먼저 준비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그럼에도 천도교가 준비 단계에서 중요 역할을 한 것으로 인식된 것은, 손병희라는 인물과 천도교가 거사 자금을 부담했기 때문”이라며 “실제로 만세운동의 준비단계인 2·1 무오독립선언, 2·8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 등에서와 거사 단계, 확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기독교회였다”고 보고했다.

또 “기독교회는 전국적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고, 그것이 서울에서 전국으로 확산되는 환경을 만들었다.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도 기독교 인사들과 기독교 학교들”이라며 “3·1운동 주도세력에 대한 통계를 보면 기독교 주도 지역이 천도교 지역보다 월등히 많고, 체포자 등 통계를 봐도 기독교가 천도교보다 적극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므로 3·1운동은 준비 단계부터 기독교 세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했고, 거사 실행 단계에서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협력했으나 기독교계가 우세했고, 후속 단계에 해당하는 임시정부 수립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중심을 이뤘다”며 “이렇게 볼 때 3·1운동은 기독교가 주도한 민족 해방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정리했다.

이후 박명수 박사(서울신대)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에 미친 영향’, 김형석 박사(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의 사명과 과제’를 각각 발제했다. 논찬에는 이은규 전 총장(안양대), 오덕교 전 총장(합동신대), 임성택 전 총장(KC대) 등이 나섰다. 폐회기도는 김용관 전 총장(부산장신대)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