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조직신학회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크리스천투데이 DB
V. 오늘날의 3·1 운동 백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의 과제

1. 오늘날 한국교회는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를 극복하고 자발적 희생, 공공성과 공동체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130여년 동안의 양적 성장과 사회적 기반 확충 가운데서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로 변질되어 분열된 모습을 극복해야 한다. 자발적 희생, 공공성과 공동체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복음이 전파 된지 불과 30여년 만에 초기 기독교가 3·1운동에서처럼 복음이 그처럼 한국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호주 출신 아시아복음주의 신학자 브루스 니콜스(Bruce Nichols)가 예리하게 지적한대로 "복음이 어느 사회에 들어가든지 결코 손님으로 얌전하고 공손하게 있었던 적은 없다. 그 복음은 반드시 그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민족독립운동을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으로 간주하여 기피하지 않았다. 민족독립을 신앙적 과제로 연결시켰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민족 앞에서 고민하며 신앙과 민족의식을 일치시켜 국가 독립의 대의(大義)에 참여한 선배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당시 일제 강점기에 만세운동을 이끌면서 초교파적인 단합을 통한 민족헌신의 모습을 보였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되돌아 가야 할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개인구원보다는 자발적 희생, 공공의 신앙, 개교회주의보다는 공동체 정신에 입각하여 복음 신앙을 실천하였다. 과거에 대한 지나친 적폐청산으로 사회가 분열되고 있는 오늘날, 먼저 기독교 안에서 화해의 정신이 살아나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반대자를 용인하는 용서와 화합의 정신을 사회에 보여줘야 할 것이다.

2. 희생적 지도력이 요구된다.

이승훈 장로는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 신앙인이었다. 1910년 이승훈은 12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2년 동안 갖은 고초와 고난을 당하다가 1912년에야 오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오산으로 돌아온 이승훈은 정기정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더욱 더 충성스럽게 섬겼다. 그러나 또다시 105인 사건으로 형무소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다. 1915년 2월 감옥에서 풀려 나왔다. 그가 52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오산학교로 달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학생들을 만나보고 그 길로 평양신학교로 달려갔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앙과 신학의 훈련을 받았다. 이승훈은 1916년 오산으로 돌아와서 장로로 장립을 받아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생명을 바쳐 받들어 섬겼는데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4년 동안 그의 신앙은 가장 뜨겁게 불타올랐다고 한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때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3년 동안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그의 믿음은 감옥 안에서 더욱 더 두터워지고 굳건해졌다. 구약을 20번이나 읽었는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시편, 이사야서, 예레미아서를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굳게 다짐하며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쳤다. 김명혁은 이승훈의 삶은 민족을 위한 제물의 삶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같이 피력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다. 희생하면 가난해지고 고난당하는데 이성봉 목사는 거지로 살았다. 사례를 집에 가져온 일이 없다. 손양원 목사도 거지처럼 살았다. 손동희 권사는 고아원에서 살았다.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도 고아원에서 자랐다. 신앙의 선배들 중 부자가 없었다."

3. 신앙적 사상적 지조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3·1운동 후 지도자들의 변절에 대해 전혀 바람직하지 않지만 우리는 쉽사리 판단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윤치호, 이광수 등 본인들도 안타까웠으리라. 인간의 약함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지만 이승훈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지조를 지켰다. 그도 물산장려운동을 했는데 역사학자들 중에는 그걸 개량주의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이승훈의 삶과 일치하지 않는 부적절한 견해다. 이승훈은 3·1운동 33인 중 공적으로 가장 나중에 출옥한다. 제일 악질로 보였던 것이다.

33인 가운데도 변절자들(박희도, 최린, 정춘수)도 있었다. 이들에 관하여 흑백 논리로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박희도는 33인 중 최연소인사였다. 3·1 운동 후 잡지 『생활사』 창간하였다. 이후 여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당시 신문 가십란의 단골 스타가 되었다. 결국 친일 성향의 월간 잡지 『동(양지)광』의 창립인,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1948년 반민특위에 회부되었다가 1951년 별세했다.

최린은 천도교도로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1934년 중추원 참의, 37년 총독부 조선어판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 39년 임전 보국단장을 역임하는 등 친일에 앞장섰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다른 이들과 달리 눈물로 참회하는 진술을 하였다. 이때 옆에서 "민족을 위해 친일하였다"고 진술하는 이광수에게 닥치라고 했다. 6.25 때 납북되었다.

정춘수는 3·1 운동 당시 감리회 목사로 함경남도 원산에서 만세 운동을 지도했다. 1934년 흥업 구락부 사건으로 고문당했다. 신사 참배 및 창씨개명 행위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간주되나 박희도 및 최린에 비하면 적극적인 친일 행적을 하지는 않았다. 자발적으로 한 이들과 다르게 못 버텨서 굴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독립 유공자에서 제외되었으며 1951년에 사망했다.

이들에게 변절자라고 비난하기 이전에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해야 한다. 배반할 줄 알고 서명한 건 아닐 텐 데 인간이기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오욕의 역사이지만 이승훈 선생은 탓하지 않고 자신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남강의 제자였던 한경직은 다음같이 스승에 대해 회고하였다: " '지금은 일본 사람들이 모든 세력을 다 가지고 모든 걸 다 주장하니깐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렇게 되니까 애국 지사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변한다' 라고 탄식하시면서 마지막 말씀은 '다만 너희들은 분명히 알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 이승훈은 조선 사람으로 살다가 조선 사람으로 죽는다' " (여기서 한경직 목사는 목이 메어 울먹였다)주기철 목사는  개인 신앙의 고백이 아니라 민족적 신앙을 고백하고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하나님주의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떼 낼 수 없다"고 강조했다.

4. 종교 간의 화평 이루어야

3·1운동 전 기독교는 독자적 독립운동을 계획했으나, 후에 천도교와 손을 잡고 거사를 추진했다. 바로 협동과 화합의 정신이다. 한국교회는 천도교, 불교와 협력하여 애국적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선언문의 대표 33인을 보면 16명이 기독교인이고 15명이 천도교인, 그리고 2명이 불교인이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에서 민족대표로 참여하였으나 유감스럽게 유교와 천주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종교 지도자들의 여러 가지 형편 때문에 불참했으나 신도들은 민족적인 거사에 자유롭게 개인적으로 동참하였다. 그러므로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든 종교인들이 동참한 범민족적인 총궐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종교 간의 갈등이 없는 것은 너무나 귀중한 유산이다. 각 종교의 독특성을 인정하더라도 종교 간에 배타적이거나 갈등이 있어서는 안된다. 구원은 종교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 문제 외에 다른 모든 경건의 실천은 서로 존중하고 배우고 사회성결을 위하여 함께 노력하고 통일을 위해서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 자주, 평화, 통일의 꿈이 실현될 때까지 3·1정신으로 특별히 종교인들의 사명과 역할이 중차대함을 인식하고 종교 간의 갈등을 극복하면서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야할 것이다.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한민족의 평화를 정착시킬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운동, 나아가 세계평화운동을 전개해야할 것이다. 한스 큉은 『세계윤리구상』(Projekt Weltethos)에서 제안한 것처럼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종교 간의 평화가 필요하고, 종교 간의 평화는 종교가의 대화가 요청되며 이를 위해서는 종교학적 기초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종교 지도자들은 협력과 화해를 실천해야 한다. 같은 기독교에서는 교단이 다르더라도 설교도 교류하고 상호 방문해야 한다. 구원은 첫째이나 마지막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이다. 지도자들이 서로를 끌어안는다면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나라도 새로워 질 것이다.

5. 이념을 넘어선 복음 통일

3·1운동은 이념 운동이 아니었다.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종교가 하나가 되고 남녀노소 모든 신분을 막론하고 하나가 되었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는 민족 존재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없이는 신앙의 자유도 보장될 수 없다.

당시의 과제는 독립이었지만 오늘의 과제는 통일이다. 통일을 이루어야 완전한 광복이요 3·1 운동도 결실을 맺는 것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일에 대한 이념적 접근을 극복해야 한다.애국 운동에 대한 진보와 보수가 하나 되어 서로 협력하는 사회운동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애국운동도 이념으로 갈라져 있다. 진보는 친북 쪽으로, 보수는 친미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모든 운동은 이념화 되어 있다. 북한의 세습과 독재가 용인될 수 없다. 거기에는 진정한 민족도 없고 비판과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없고 수령이라는 인위적인 백두 가문만 있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은 우리 자유를 지켜주지만 맹목적으로 거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대주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굳이 이념을 강조한다면 복음에 입각한 접근이다. 국민이 주인이 되고, 국민의 자유가 보장되며, 인간을 넘어선 초월적 가치(하나님의 말씀)를 인정하는, 자유민주 및 시장 경제체제의 통일이어야 한다. 친북도, 친미도 아닌 친국민이어야 한다. 하나님 뜻에 맞는 복음적 통일이다. 국민들을 잘 살게, 바로 살게 하는 것이 이념이어야 한다. 그런 날이 우리에게 오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해야 한다.

6.  사회적 성결에 앞장 서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조선말과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았던 존경과 귀중히 여김을 회복해야 한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압력에 굴하지 않고 감옥에 들어가고 고통을 감내하였다. 그래서 신행일치하니까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성도는 성도다워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성과 성결함으로 윤리체계의 우월성을 나타내되, 입으로가 아닌 삶으로 증거 해야 할 때이다.

2차대전시 천주교의 교황은 나치체제의 히틀러와도 손을 잡았었다. 교황은 나치체제도 '하나님 주신 체제이니 복종하라'고 했다. 그래서 히틀러 치하 천주교는 저항하지 않았다. 교황청 천주교는 3·1운동 때도 일제 체제가 '승복해야 할 체제이므로 나서지 마라'고 했다. 그래서 천주교 어느 평신도도 민족대표로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은 대한민국의 군대장군의 신분으로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암살했다. 그는 양심이 명하는 일을 했고 그의 거사(擧事)는 살인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한 용기와 명예의 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교황주의자인 어느 신부는 안중근을 천주교에서 파문시켜 버렸다. 이는 복음의 본질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교조주의적 사고요 태도다. 당시 한국 천주교는 교황의 정책에 따라 일본 식민지를 인정하고 종교의 자유만 누리라고 교인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일부 천주교 교인들은 그건 교황 이야기라며 개인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공적 승복과 개인적 승복은 차이가 있다.

오늘날 목사들의 설교가 필요 이상으로 개인구원에 집중하고 특히 기복주의 설교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 개인주의와 성공과 번영을 강조하고 있다. 치유와 위로 설교에 치중한 나머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개혁을 위한 사명과 용기를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사회적 헌신의 중요성이 제시되어야하고 오늘날 기독교 신자는 사회적 성결을 위한 거룩한 고통의 삶을 회복하도록 강조해야 한다.

7. 차이를 인정하면서 화합하는 포용력이 요청된다.

오늘도 남북 간 문제, 세계 문제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기중심으로 하면 갈라지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하면 안 갈라지고 다양하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몸이고 우리는 지체다.  우리는 지체일 뿐인데 자기가 몸인 양 자기 중심으로 모이라고 하면 정통이 아니다. 지체는 다양하지만 다 몸에 붙어있다. 자기가 몸이요 중심이라는 사고는 몸의 리더십으로 공동체를 위하여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에 반해 우리는 몸의 지체에 붙었을 뿐 몽에 봉사한다는 사고는 지체의 리더십이다. 오늘날 몸의 리더십이 아니라 지체의 리더십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같지 않지만 화(和), 평화, 조화할 수 있으면 한다는 것이다. 남강 이승훈도 이웃과 다르지만 화(합)할 줄 알았다. 그것이 민주적 지도력이고 기독교 신앙의 바탕. 화의 지도력, 그것이 평화의 지도력이다. 그는 정통 개혁신앙을 가졌으나 민족 독립이라는 대의(大義)를 위하여 천도교도와 불교도와 함께 거사를 도모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반동성애, 낙태, 인권, 반전체주의, 반세습독재 등 윤리와 생명과 사회적 성결과 자유를 위하여 이웃 종교인들과 함께 사회적 성결과 자유 운동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

8. 평등과 일치, 보편 정신의 확산. 인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공생공영의 목표를 위해서 함께 노력

3·1운동은 모든 종교의 신자들이 민족적인 거사에 자유롭게 개인적으로 동참하였으므로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든 종교인들이 동참한 범민족적인 총궐기였다. 지역과 종교, 신분, 남녀, 연령, 이념을 초월한 3·1운동의 일치정신은 오늘날 한국의 민족 통일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념 초월의 일치 정신은 3·1운동을 일으킨 우리 민족의 정신으로서 온 민족이 단결하여 조국의 독립과 자유와 평화를 쟁취하고 나아가 세계 평화를 실현하는 정신이다. 독립선언서는 이념 초월의 보편적 사상으로서 자유평등사상, 민족주의사상, 인도주의사상, 세계평화사상 등을 대외에 천명한 것이다.

자유평등사상, 민족주의사상, 인도주의사상, 세계평화사상을 더욱 발전시켜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서 역량을 강화하고 실천운동을 통해서 범국민운동을 전개해야만 할 것이다. 편향적 이념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인류의 공동선과 자유, 평화, 평등, 사랑, 생명, 봉사, 민족통일, 복지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공생공영의 목표를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것이 종교인들의 공동과제가 될 것이다.

9. 한국민의 독특한 열린 민족주의 신앙과 교회 키워나가야: 새벽기도, 말씀위주, 십일조, 성수주일 신앙, 사회봉사 신앙.

3·1운동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적 양심이 결합되어 나타난 사건이다. 기독교 신앙은 정의, 자유, 평화에 기초하고 있고 민족적 양심은 자주, 평등, 해방에 기초하고 있다. 이 '민족주의적 신앙'은 결코 닫힌 민족주의로 머물지 않고 민족적 개성과 인류를 향한 보편적 가치를 연결시켜주는 열린 민족주의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민족적 개성'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세계화와 개방화 시대, 세계와 화친해야 한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민족적 개성을 매몰시켜선 안 된다.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자면, 민족적 개성과 문화로 세계에 진출하고, 동시에 세계적 보편성의 장점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늘날 케이팝(K-Pop, Korean Popular Music)을 통해 동남아와 세계로 전해지는 문화적 흐름인 한류(韓流)도 이러한 한국적 개성과 인류 보편성의 조화 속에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10. 3·1정신을 일본과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시키는데 한국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3·1운동의 평화정신은 한국이 독립해야 일본과 동양의 평화 또한 가능하다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내 나라의 독립이 곧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이 독립선언의 정신인 것이다. 이 정신은 폐쇄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보편적 인류애로 접근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먼저 한국에 오는 외국인 근로자를 품어 그들을 보편인간성으로 품어 인간다운 근로조건과 이 곳에서 고향처럼 느끼도록 하는 것이 요청된다. 우리도 한 때는 식민지였던 약소민족의 상처와 비운을 가지고 있어서 저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민족적인 역사적인 공감대가 있다. 이러한 식민지 독립운동을 저들과의 교감과 연대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저들이 한국에서 체류할 동안 저들에게 전도하여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고 하나님 자녀가 누려야 할 권리를 향유토록 도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3·1정신을 살리는 일 가운데 하나다.

둘째, 일본과의 관계를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시켜야 한다. 한국은 일본과 협력해서 동북아시아 평화를 이뤄내야 한다.  대통령이 3·1운동의 평화정신을 오늘날 잘 설명하고 정책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문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정보원·검찰·경찰 개혁 전략회의에서도 일본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을 '칼 찬 순사'에 비유하면서 "당시 검찰과 경찰은 국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했다. 이는 대통령이 구사할 내용이 아니다. 일국의 대통령은 보다 품격이 있어야 한다. 최근 방송의 독립성을 잃은 공영방송 KBS도 정부방침에 편향되어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혐일(嫌日) 감정을 선동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미국·일본이 대북 제재와 압박을 위해 '한·미·일 3각 관계' 결속을 다져야 할 때다.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와의 '북방 3각 관계'를 다지며 대북 제재에 맞서고 있다. 한·일 관계 악화는 적전(敵前) 분열이자 안보 경제 민간 교류면에서 자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한·미·일 3각 관계 붕괴로 북핵 및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국은 물론 일본도 북한의 공격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일 양국은 북핵 폐기와 자유민주 수호라는 공동의 가치 및 목표를 공유하는 공동 운명체라는 것을 직시하고 하루빨리 대결이 아닌 협력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일본이 우경화하고 현명하지 않다고 야단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시기야말로 일본을 설득하는 게 중요하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3·1운동 정신이다. 한·일 관계가 계속 악화하는 상황에서 2019년 2월 6일에 일본의 지식인 226명이 3·1 독립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양국이 화해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협력할 것을 권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를 비롯한 일본 지식인들은 일본 국회에서 발표한 성명에서 "올해는 3·1 독립선언이 발표된 지 100주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라며 "(한국인들은) 일본에 병합돼 10년간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일본을 위해서라도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고 설득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 성명에서 "(지금은) 조선 민족의 위대한 설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동북아 평화를 위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바탕으로 일·한, 일·북 간의 상호 이해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지식인들도 이에 상응하는 용서하고 화해하는 태도를 가지고 일본과 지식인들 사이에 교회 간에 대화를 나누고 양국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일본인들을 모두 군국주의자라고 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본에는 양심 지식인들과  2차대전 말기에 동경대 지하실에서 군국주의 일본이 패망하기를 기도하는 독실한 기독교인교수들과 학생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마야마 유키오 일본 전 총리는 광복절 70주년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아와 순국선열추모비에 헌화하고 무릎을 꿇고 사죄한 적도 있었다. 존경할만하고 용기있는 일이다. 걸림돌이 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하여는 문희상 국회의장이 피력한 바같이 "일본을 대표하는 총리, 혹은 퇴위한 일왕이 (사죄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 될 것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전쟁 범죄의 주범 아들이므로 "그분이 한번 (위안부) 할머니들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한마디 하면 (위안부 문제로 인한 갈등이) 깨끗이 해소될"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 가 독일 나치의 폴란트 침공과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묘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은 폴란드 국민의 마음을 풀어주어 폴란드와 독일이 다시 화해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메르켈 (Angela Merkel) 독일 총리는 2015년 "나치 만행은 독일의 항구적 책임"이라고 유대인에 대한 사죄를 반복하면서 선진국의 품격을 나타내었다. 독일은 1952년부터 700억달러 넘게 피해 유대인들에게 보상을 지급하면서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회피하는 일본 아베 정권과는 너무나 대조를 이루고 있다.

2019년 2월14일 일본 도쿄 한복판에 있는 국회 참의원회관에서 일본인 변호사들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높이 평가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인권을 중시하는 국제적 흐름에 맞는 정당한 판결이다."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아베 신조 총리의 말이 오히려 있을 수 없는 말이다." 발언의 주인공들은 일본인 변호사들, 가와카미 시로(강제징용 배상 판결 설명회 간사), 야마모토 세이타(영화 <허스토리>에 나온 '위안부' 할머니들의 소송 '관부재판'에 참여), 아다치 슈이치(히로시마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강제징용·원폭피해 손해배상 소송 참여), 자이마 히데카즈(미쓰비시중공업 소송 참여), 재일동포 장개만 변호사 등이다. 이러한 일본의 양심세력이 있다는 것은  오늘날 악화일로에 있는 한일간의 다리를 잇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이며, 앞으로 한일간에 대화와 공존을 위한 미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1. 진정한 3·1독립정신의 계승이란 탈일본 정신 뿐 아니라 탈중국 정신으로 승회되어야 한다.

서울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은 구한말 자주독립의 의지를 모아 세운 기념물이다. 독립문은 반일(反日)이 아니라 반중(反中)의 산물이다. 독립문의 건립을 주도한 것은 서재필이 이끈 독립협회였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10여년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서재필은 1895년 12월 귀국하여 다음해 4월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는데, 그 첫 사업이 명(明)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세워진 영은문(迎恩門) 철거와 독립문 건립이었다.

여태까지 우리는 자주독립국이었던 조선이 일본의 부당한 침략으로 식민지가 되었다고 배웠다. 그러나 조선은 온전한 독립국이 아니었다. 최초의 불평등조약으로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조약의 제1조는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듬해 중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는데 제1조가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였다. 일본은 두 차례 조약에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한 이유는 조선이 중국의 속국(屬國)이 아니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확인받고 자신들이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인 자객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년 10월)과 고종이 일본의 핍박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1896년 2월) 직후에 영은문은 철거되었다.

독립문이 완공되기 한 달 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 위치)에 올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바꾸고 독립국가임을 선포하는 광무(光武)개혁을 단행하였다. 왕에서 황제로, 전하에서 폐하로의 명칭 변경은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이라는 중화질서 속 동이(東夷)의 신분에서 벗어나겠다는 자주의지의 표출이었다. 1897년의 광무개혁과 독립문 건립은 대중(對中) 독립선언이었다. 그러나 대중 독립을 통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10년의 한일병탄으로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냉엄한 국제정치 용어로 표현하자면, 중국의 속국이었던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처지가 바뀌었다.

2017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자신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실질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하더라"고 했다. 중국 지도자들은 전통적으로 이러한 인식을 가져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존경한다고 했던 마오쩌둥은 조선을 중국의 식민지라 칭했다.(에드가 스노 '중국의 붉은 별') '한국은 중국의 속국' 발언은 '독도는 일본 땅'보다 몇 곱절 강도가 센 발언임에도 문재인 정권은 '차분하게' 대응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 친중의 흔적은 외면하고 친일 흔적만 현미경 조사하려는 편협한 자세는 중국발 미세먼지에 대한 무기력한 대응을 낳을 뿐이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은 과거의 '조공(朝貢) 외교'로 돌아가고 있다. 시진핑은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특사를 두 차례나 하석(下席)에 앉혔다. 홍콩·마카오 행정장관이나 지방서기가 시 주석에게 보고하는 자리였다. 문 대통령의 혼밥 논란이 발생한 곳도 베이징이다.

동북아의 균형자를 표방하는 문재인 정권은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비판한다. 반면 사드 반입했다고 자국인들의 단체한국여행을 취소시키고 자국 내에 있는 한국기업에 철퇴를 내리는 중국에 대해서는 침묵 또는 차분한 대응으로 일관한다. 반(反)해양, 친(親)대륙이 이들의 기본 스탠스다. 어떤 인사는 공공연히 한국이 대륙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5천년 역사에서 한국이 중국보다 앞섰던 기간은 중국, 러시아 등 사회주의 대륙세력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미국, 일본, 서유럽 등 자유주의 해양세력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기간이었다. 해양세력과의 교류협력을 한 단계 강화하면서 대륙세력과의 새로운 관계를 개척해가는 것이 정도(正道)일진대 문재인 정권은 거꾸로 가고 있다.

맺음말: 한국교회는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실천으로 4차 산업시대에서 한국사회를 동북아 평화의 선진나라로 이끌어야.

3·1운동은 신앙과 민족적 양심이 결합된 사건이었다. 3·1정신은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갈망하던 신앙인들이 민족을 향한 사랑으로 일제에 저항하여 민족 독립을 위하여 순교적 피를 흘리며 지킨 신앙 정신이었다. 3·1정신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 정의와 평화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추구한 정신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제1종교가 된 한국기독교는 3·1운동의 정신을 함양하고 고취시키고 계승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3·1운동의 정신은 단순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민족주의 이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갈망하던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연합기관, 그리고 각 교단이 하나된 모습으로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남북주민 8천만을 섬기며 통일시대를 열고 다시 도약하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다원주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종교 다원주의의 위험을 극복하고 타종교에 대해서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인류의 공동선과 자유, 평화, 평등, 사랑, 생명, 봉사, 민족통일, 복지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공생공영의 목표를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것이 요청된다. 한국교회는 이 시대적 과제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국내외적으로 협력을 위해 움직이고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확보해 가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실천함으로써  한반도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에 기초한 평화통일을 이루어 다가온 4차산업시대에서 통일된 대한민국을 동북아 평화의 선진나라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