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경험의 학교’에 들어간다. 우리가 사는 한 모든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학교이기도 하다.

인생의 학교는 어른을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참석하는 학교보다 다소 더 엄격하다. 어른들은 잘 안다. 이 학교 교육이 얼마나 엄격하고 얼마나 힘든지.

어른들은 이 학교에서 끊임없이 저항한다. 이 학교의 교육과 훈련이 힘드니까. 그리하여 이 학교 교육에 저항하고 저항하다가 자신의 요구를 축소시킨다.

슬픈 일이다. 그는 선을 고집하는 한, 오직 선만을 마음에 품는다면 인생이 잘 풀릴 줄 알았다. 열심히 살면서 선을 품고 살면 삶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떤가? 어른? 점점 더 선에 대한 믿음, 선에 대한 담대한 확신은 사라져 간다. 그는 주변을 살펴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상을 움켜쥐었지 본다.

조금만 세상과 타협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본다. 그리하여 그는 심약해져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경험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때 그의 마음은 변했다. 선생이 없을 때, 학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보통 학생들이 주도권을 쥐고 뒤흔들고 떠들고 있으니 우수한 학생들은 실력발휘를 할 수가 없다.

학교에 선생이 없을 때 우수한 학생들이 제대로 실력발휘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이 경험의 학교에서는 동일한 일이 벌어진다.

왜냐하면 이 경험의 학교에서는 선생이 없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해서 경험의 학교에서는 우수한 학생이 의지할 만한 선생이 없다. 경험의 학교에서는 우리 모두가 학생이니까.

이 경험의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조금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진리 안에서 선을 품고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면, 보통 학생들이 와서 한 마디 한다.

“좀 쉬는 게 어때? 사서 고생할 필요 없잖아? 쉽게 갈 수 있는 길도 많은데 안타깝네.”

따라서 이 경험의 학교에서는 그를 이끌 선생이 없기 때문에 그가 오직 선을 마음에 품고 계속 진군하려 한다면, 자기 자신 안에서 스스로 격려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어른, 그는 이 격려를 찾지 못했다. 그의 용기는 금이 갔다. 결국 그는 세상에 굴복하고 만다.

세상은 그에게 보상을 한다. 그가 선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다만 세상과 타협하며 보상을 받았을 뿐이다. 악이 형벌을 가져다 준다면, 그는 계속해서 악을 배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보상으로 유혹할 때, 그는 쉽게 보상을 물리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것은 두 마음이다. 선과 보상은 갈림길이다. 이질적이다. 보상을 얻기 위해 선을 구할 수 없다. 제3의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선을 품으면서 세상의 일시적 보상을 얻는 길은 있을 수 없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길을 가는 것은 좁은 길이다.

우리의 착각은 이렇다. 처음에는 이 길이 좁다. 하지만 점점 더 넓어지다가 언젠가는 탄탄대로가 되어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착각. 이런 착각은 두 마음을 품게 한다.

주님의 길은 처음에는 좁다. 그런데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은 점점 더 좁아진다. 결국 점점 더 좁아지다가 죽음에 이른다. 세상에서는 이 길이 너무 좁기 때문에 세상이 이 길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 길이 보인다.

따라서 경험의 학교에서는 이 길을 볼 수 없다. 경험의 학교에서는 한 마음을 품기가 힘들 뿐더러, 오히려 좋은 학생을 퇴보시킬 뿐이다.

그러니 경험의 학교에서 배우려 하지 말라. 믿는 자가 입학해야 할 학교는 고난의 학교다. 이 학교의 교육은 경험의 학교보다 더 고되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 유익하다.

이곳에서 차라리 선으로 고단당하는 법을 배우라.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