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성경은 관점에 따라 서로 상충되거나 불연속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런 착시(錯視)가 사람들로 하여금 구약 시대는 ‘율법시대’로 신약 시대는 ‘은혜 시대’로 나누는 이분법적 해석을 낳게 하고, 시대별로 삼위일체 사역을 구분짓는 세대주의 성경 해석을 낳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마저도 시대, 정황, 사람에 따라 곧, ‘case by case’ 식으로 서로 상충돼 보이는 듯하다. 즉 이방인과 유대인, 빈자와 부자, 죄인과 종교엘리트들에 대한 그의 요구사항이 달라 보인다.

예컨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과 죄인들에게는 율법 준수가 면제된 ‘오직 믿음’만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고, 율법 준수가 몸에 배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는 엄격한 율법적 의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Lepton, copper coins) 연보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예수님이(눅 21:4) 부자에게는 전 재산을 헌납하고 자기를 따라야만 영생에 이른다(마 19:21)고 말하므로, 빈자 부자에 대한 연보와 구원 기준을 달리 적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전 재산을 드려야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의(self-righteousness, 自義)’로 구원을 얻으려는 부자에게 반어법(反語法, irony)으로 대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모든 인간이 한 치의 차이도 없이 전적 무능하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 사람에 따라 ‘case by case’ 식으로 기준을 달리 하실 리 없기 때문이다.

율법에 통달한 종교엘리트이건 율법을 모르는 죄인과 이방인이건, 아담의 원죄를 타고나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율법의 의에 이를 수 없다. 정말 사람에 따라 예수님이 요구하신 의(義)가 달랐다면 예수님이 인간을 오해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 완전한 율법 준수를 요구하신 것은, 그것이 그들에게 가능하다는 것이거나 그것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이는 자의(self-righteousness, 自義)로 충만한 그들을 율법으로 정죄하여 ‘믿음의 의’를 붙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갈 3:24). 예수님이 정말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 율법의 의를 기대하셨다면, 율법을 다 성취하지 못했다고 그들을 외식자(마 23:13-29), 마귀의 자식(요 8:44)이라고 저주하진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자애로운 성품과도 위배된다. 그 분의 성품대로라면, 지성(至誠)을 다한 눈물겨운 노력에도 율법을 이루지 못한 그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반올림(rounding off)을 해서라도 그들의 의를 인정해 주었을 것이다. 이행득구(以行得救)가 불가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 앞에서 정죄 받게 해 이신득구(以信得救)를 의지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파괴 없이 건설이 없다’는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 교수의 말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의 의’를 갖게 하려면 먼저 율법의 정죄로 그들의 거짓된 자의(自義)를 훼파시켜야 했다.

또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율법의 의’ 대신 ‘믿음의 의’를 요구 한 것은 율법 준수가 몸에 배지 않은 그들의 형편을 고려한 것이라는 억측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만인에게 평등한 율법의 공의 앞에 이런 온정주의 역시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의 정확한 의미는 거짓된 자의(自義)의 확신에 빠진 율법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미 양심법(롬 2:15)의 정죄로 죄의식에 찌든 그들에게는 재차 율법으로 정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음하다 붙잡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자를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요 8:11)’라고 하신 것이나, 이웃의 질시를 받던 죄인 삭개오를 향해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눅 19:9)’이라고 선포해 주신 것이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한 십자가의 강도를 향해 어떤 요구도 없이 ‘낙원 약속(눅 23:41-43)’을 해 주신 것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당시 엄격한 유대 율법주의적 사회에서 이런 예수님의 선언은 파격 그 자체였다. 이것으로 인해 어쩌면 예수님은 동시대인들로부터 ‘도덕폐기론자(antinomianist)’라는 비난을 받았을지 모른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예수께 끌고 와 ‘이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시험한 것도, 사실은 예수님에게 그런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것이었다(요 8:6).

이 모든 사례들은 죄의식으로 그리스도께로 피하는 자들에게는 율법의 제시(정죄)없이 이신칭의(以信稱義)해 주신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행위의 의(義)’를 요구하는 ‘십계명’보다 더 엄중한 ‘마음의 의(義)’를 요구하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믿음의 의’를 요구하는 바울 서신과 서로 상충된다고 주장한다. ‘팔복’을 중심으로 한 ‘산상수훈’이 행위의 법을 가르친 듯 하나, 사실 ‘결과론적 이신득구’를 말씀한 것이다.

나아가 예수께 배워서 나온 사도 바울의 ‘이신득구’는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신 4복음서보다 한 급 아래로 쳐야 한다며, ‘이신득구’를 평가절하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왜곡된 관점에 의거하여 시대, 정황, 사람에 따라 다른 소위 ‘case by case’ 식의 비일관적인 가르침이 구원의 교리화, 체계화를 불가능하게 했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이 역시 억측일 뿐이다. 성경은 결코 그들의 주장대로 비일관적이지 않다. 비일관성은 비연속성은 하나님의 속성과도 맞지 않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실 때 즉흥적이거나 우발적으로 하시지 않는다.

특히 그의 구원 사역은 영원한 작정과 경륜 속에서 일관성과 연속성을 견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관성과 연속성이 ‘구원 예측’과 ‘구원 교리’를 가능하게 한다.

웨스터민스트 소요리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해설서 저자 토마스 빈센트(Thomas Vincent, 1634–1678)는 ‘신구약 성경 속에 기록된 말씀이 왜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성경의 일치와 조화로움’을 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경 속에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사이에 일치가 있으며, 성경의 예언과 이 예언의 성취 사이에 일치가 있다. 성경에는 또한 명령들의 조화, 역사적 사건들의 조화, 그리고 계획의 조화가 있다.

성경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장구한 시대에 걸쳐 각기 다른 장소에서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기록들은 모두 조화를 이루었으며 어떠한 상이함도 그 속에서 발견되지 않았다(인간의 의무 중).”

이러한 성경의 일관성과 조화는 구원의 도리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며,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구원의 길을 이해할 수 있고 예측 가능 할 수 있게 한다.

만일 구원의 길이 시대, 정황,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제시되는, 곧 ‘case by case’ 식이 된다면 일관된 ‘구원 도리’가 세워질 수 없을 뿐더러, 구원의 예측도 불가능해진다.

그 결과 자신의 구원 확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권유하고 가르칠 수도 없게 된다. 로마가톨릭교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전도에 소극적인 것은, 그들의 구원이 예측불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가 성경은 모든 사람이 이해 가능하도록 명백한 구원의 도리를 제시한다 고 가르친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알아야 하고, 믿고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은 성경 안에 여러 곳에 아주 분명하게 제시돼 있고 밝혀져 있기에, 유식한 사람뿐 아니라 무식한 사람일지라도 통상적인 방법을 적당하게 사용하기만 하면 그것들을 충분히 이해하는데 이를 수 있다(성경론 7항)”.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