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먼저 쉬운 것부터 이야기해 보자. 보상을 받기 위해 선을 품은 사람은 한 마음이 아니라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다. 선은 한 가지일 뿐이고 보상은 별개다.

이런 식으로 선의 길을 가려 한다면,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연한 것을 행하기보다, 양쪽 눈을 사용하여 한 가지를 바라보기보다, 한 쪽으로는 한 측면을, 다른 한 쪽 눈으로는 다른 측면을 보고 있는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시력에 혼란을 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 마음을 품은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선과 보상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보상을 탐하게 된다면, 선은 고상하고 거룩한 요소이며 보상은 유혹하는 요소다. 그러나 유혹은 절대 좋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보상은 세상의 보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원히 선과 함께 결합시킨 보상은 의심스러운 어떤 것도 없고 확실하니까. 현존하고 있는 것이나 앞으로 다가올 것도, 높음이나 낮음도, 천사나 악마도 선과 보상을 분리할 수 없을 것이다(롬 8:38-39).

그러나 세상이 가장 깊은 내면에서 선이 아니라면, 성서가 말하듯이 세상이 악한 자의 권세 아래에 있다면(요일 5:19), 반면에 선을 품지 않는 자가 결코 드문 예가 아니라면, 세상의 보상은 정말로 의심스럽다.

그 때 세상은 자기가 선으로 간주 하는 것에 보상할 것이다. 선과 닮은 것에 보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보상은 정말로 유혹하는 요소다.

이 문제는 어렵지 않다. 만약 남자가 소녀를 돈 때문에 사랑한다면, 누가 그를 애인이라고 부를 것인가? 결국 그는 소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한 것이다. 그는 재산 사냥꾼이지 애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다.

“내가 사랑한 건 소녀요. 그 소녀가 돈을 가지고 있을 뿐이오.”

그가 이렇게 말했다면,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므로 그가 우리에게 의견을 묻는다면, 그 대답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이 돈이 문제를 만드는 군요. 돈은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들 말하죠. 그래서 쉽게 오해받을 수 있죠. 아이고, 안타깝게도 돈 때문에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알리기 어렵게 되었네요.”

이 문제로 인해 그가 깊이 걱정하고 있다면, 그의 사랑이 시험받을 수만 있다면 돈이 사라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진정으로 연인이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이 소녀는 단 하나의 결점이 있지. 그것은 그녀가 돈을 갖고 있다는 거야.”

자, 그렇다면 그녀는 뭐라 말할까? 만약 그녀가 “내가 꼭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를 부자로 만들 수 있는 장점이 내게 있기를 바라는 거지”라고 말했다면?

그녀를 진정한 애인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인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결국 그녀 또한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하지만 사랑하는 두 사람이 그들에게 장애물이었던 이 돈으로 선한 일을 하기로 합의 한다면, 그들은 사랑만을 마음에 품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원컨대, 어떤 사람도 이 지점에서 “인생이 이 두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함으로써, 이 아름다운 생각의 순수한 상상을 방해하는 일에 분주하지 않도록 하소서.

슬프다, 비참한 지식, 현실과의 어떤 야비한 친분이 존재한다.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큰 보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한다. 이렇게 선을 행하고 보상을 받는 일이 큰 명예가 되었다.

방방곡곡에 있는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 보라. 어떤 설교가 들려오는가? 선을 행하고 보상을 설교하는 소리뿐이다.

주님이 비판한 사람이 누구인가?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은 의를 행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하고, 구제할 때 역시 영광을 받기 위해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을 좋아한다.

주님께서는 이들이 이미 자기 상을 다 받았다고 말씀하신다(마 6:1-2). 하늘에서의 보상은 없다.

결론을 짓자. 한 가지만 가장 확실하다. 선과 보상은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선과 보상을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은 그건 세상의 보상일 뿐이다. 그것은 진실하지 않다.

선과 보상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선 자체가 보상이란 말이다. 이렇게 선을 품는다는 것은 품는 그 순간 선에 머물게 된다. 그 이상 무엇을 구한단 말인가!

하나 덧붙인다면, 착한 일을 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고 뜻밖의 보상이 올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좋고 완전한 선물로 받아들이라. 하지만 이것은 다르다. 보상을 받기 위해 선한 일을 하지 말라.

보상 때문에 선을 품는 것은 두 마음이다. 따라서 한 마음을 품은 것이란 “보상을 위해 보상 없는 선을 품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 한 마음을 품는 것이란 선을 품지만 세상에서 선을 위해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