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의 성령론(64)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보드만(William E. Boardman)은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헌신을 하고 난 후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의식적인 증거'(a conscious witness of Christ's indwelling)를 얻게 되는데, 이를 그는 두 번째 회심으로서의 '성령세례'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내가 함께 참여했다고 하는 영적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합을 실제적으로 가능케 해주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고든(Adoniram Judson Gordon)은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고, 또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연합된 유익을 깨닫도록 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우리를 신비적으로 연합시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의 능력과 연합되고 또 그분의 부활의 능력에도 역시 연합케 하여 다 이루신 공로를 통한 능력을 우리도 경험케 하시는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3-6)
그렇다면 우리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위의 성구에서 6절을 보면, 여기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나의 자아(ego)가 아니고 나의 옛사람(old being, old self)이다. 옛사람이란 이전에 죄의 법을 따라 살던 옛 '자신'이다. 옛 '자신'은 죽고 이제는 새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다. '죄의 몸이 죽는다'는 것은 '몸'이 죄에 대해서는 이제 단번에 쓸모없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계속 지배를 받지(δουλεσιν; 현재형) 않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 '누군가와 함께 못 박혔다'(συνεσταυρωθη).
헬라어 성경에는 다만 누군가와 함께(συν) 못 박혔다는 것만이 나타난다. 영어성경(NIV)에는 '그와 함께'(with him)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의 옛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과연 누구겠는가? 우리말 성경에는 '예수와 함께'라고 되어 있다. 우리의 옛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롬 6:8)라고 함으로서 증명이 된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동사는 부정과거 수동태로 표현되었으므로, 못 박혀진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한 바로 그 사건이며, 또한 부정과거형 표현은 이 사건이 미완료된 일이 아니라 단번에 이루어진 일임을 명시하는 것이다.
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라는 말은 우리의 거룩함의 근거가 이러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영적 사실에 대한 확실한 앎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누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사건을 부인할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예수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이가 누구인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이미 예수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은 더 이상 '죄'에 끌려갈 이유가 없다. '자신'을 하나님을 향해 드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인 여러분은 자신 자체가 죽은 것은 아닐지라도 이미 자신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이 여전히 힘 있게 살아있을지라도, 더 이상 여러분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Andrew Murray)
이처럼 거룩한 삶의 비결은 우리의 옛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능력을 고백함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옛사람을 저버리고 부인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다."(Preston Leigh) 그런가 하면 우리의 능력 있는 삶의 비결은 우리의 새사람과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능력을 고백함에서 솟구친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연합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끊임없는 교제를 원하신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교제하면서 그분의 뜻 앞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순간마다 살아가는 가슴 벅찬 기쁨과 비할 데 없는 만족의 삶이다. 그러한 삶 속에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충분히 구현해내는 풍성한 성령의 열매와 그리고 땅 끝까지 권세 있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뒤따르게 된다.
청교도 신학의 정수는 바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교리로서 구약과 신약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되었다. 성경은 청교도의 안내서였고 그리스도는 이 안내서의 핵심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의지가 성도의 생존과 애정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격려되었다. 웨이크필드(Gorden S. Wakefield)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했듯이, 청교도들은 그들의 성례전이나 예배, 또는 설교 등 모든 교회 기능에 있어서 언제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중시하였다.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존 웨슬리의 부흥운동도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 중생과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의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그리고 찰스 피니(Charles Finney)의 부흥운동도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진리가 우리를 성화의 길로 인도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는 19세기 남북전쟁 이후에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성령운동, 20세기 초의 오순절운동, 20세기 중반의 은사갱신운동, 그리고 현대의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제3의 물결(the Third Wave)까지를 잇는 복음적 성령운동의 힘 있는 연결 고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