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김명혁 목사와 함께한 박윤선 목사.

‘박윤선 목사님의 기도와 말씀과 온유와 겸손의 영성을 염원하며’라는 주제로 김명혁 목사(한복협 명예회장, 강변교회 원로)와 박병식 목사(송파제일교회 원로)가 16일 오전 서울 강변교회에서 대담을 진행했다.

김명혁 목사는 매달 한 차례씩 교계 주요 원로들과 신앙의 선배들을 주제로 대담을 열고 있다. 대담은 두 사람의 발표와 이후 토론 순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루한 미국 유학길 배편 17일간 요한계시록 암송
영어, 헬라어, 히브리어에 능통 네덜란드어도 자습
신학자이자 성경 주석가, 성경 주석은 평생의 사명
유학 기간 문제 제기될 정도로 간절한 통곡의 기도

먼저 박병식 목사는 박윤선의 생애를 순차적으로 소개했다. 그는 “박윤선은 1934년 3월 미국 유학길에 오르는데, 17일간의 지루한 항해를 요한계시록을 암송하면서 ‘단맛 나는 여행’으로 만들었다”며 “그가 암송한 말씀은 곧 그의 기도가 되었다. 그는 평생을 ‘말씀 기도’를 지속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때까지 요한 계시록 18장까지 암송하고, 그곳에서 필라델피아까지 한 주간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계속 요한계시록을 암송하면서 말씀 기도를 했다”고 전했다.

박 목사는 “박윤선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약학자인 반틸 박사에게 주경신학을 배우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 그곳에서 한부선을 만나 50년 이상 서로 신앙 동지가 됐다”며 “당시 박윤선은 이미 영어, 헬라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영어 강의를 능숙하게 이해했다. 그러면서 3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 카이퍼와 바빙크가 네덜란드 사람이어서, 그들의 신학 체계를 깊이 연구하기 위해 틈틈이 네덜란드어도 자습했다”고 밝혔다.

그는 “귀국 후 박윤선은 평양신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강의했다. 그러나 1938년 장로회 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양신학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자진 폐교했다”며 “이후 만주 봉천 교포들이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박형룡과 박윤선을 초빙하자, 1940년 봉천으로 가서 봉천신학교를 설립했다. 50-70명의 학생들을 위해 말씀을 전했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봉천에까지 미쳐 신학교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박병식
▲박병식 목사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박병식 목사는 “해방 이후 박윤선은 한상동을 만나 부산으로 가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박윤선은 자신의 삶을 다 드리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고려신학교를 위해 헌신했다. 후에 교회간의 소송건과 주일 성수건 등으로 고려신학교를 떠나야 했다”며 “1963년부터 1980년까지는 총신대학교에서 신학 강의에 전념했다. 그가 남긴 공헌은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시국의 어려움으로 인한 학내 소요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다 총신대도 떠나게 됐다”고 회고했다.

박 목사는 “학내 소요로 학교를 떠난 일부 교수들과 수백 명의 학생들의 간청으로, 박윤선은 합동신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1988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남은 삶을 다 바쳐 헌신했다”며 “박윤선은 신학자인 동시에 성경 주석가였다. 그의 성경 주석은 일생에 걸친 사명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박윤선은 계시 의존 사색을 고수하면서, 오직 성경에만 몰두하여 성경을 주석했다. 해답을 얻지 못하는 성경 구절 앞에서는 몇 시간씩 기도했다”며 “마침내 1979년 성경 66권 주석이 완성됐다. 박윤선의 성경 주석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다”고 강조했다.

또 “박윤선은 목회자였다. 평양 숭전대에서 공부하는 4년 동안, 모란봉 너머 가현교회에서 목회했다. 해방 전 만주에선 우지황 교회와 배자상 교회에서, 해방 후 평북 철산 장평 교회에서 목회했다. 남한으로 온 뒤에도 계속 목회했다”며 “평생 그는 교회를 사랑하고 목회자로서 자신의 삶을 다했다. 그는 달변가나 웅변가가 아니었지만, 평생 큰 소리로 진지하게 설교했다. 아무런 수식 없이도 감동을 줬고, 강한 책망도 듣는 이들의 마음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고 했다.

박병식 목사는 “박윤선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평양 숭실 시절에는 방지일, 김진홍 등과 조기 기도대를 조직하여 모란봉에 올라가 계속 기도했고, 유학 기간에도 기도했다. 그의 간절함과 통곡하는 기도가 학교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그는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며 “그는 자주 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88년 5월 교역자 수련회 강사였을 때, 이미 그의 간은 거의 녹아 있었다. 그러나 온 힘을 기울여 말씀을 전하고, 쉬는 시간에는 깊은 산 속에 들어가 기도했다. 운명 직전까지, 그는 기도하기를 소원했다”고 이야기했다.

기도에 전념하는 삶: ‘쉽게’ 아니라 ‘수고스럽게’ 기도
말씀을 사랑하는 삶: 성경 모든 구절들이 살아 있도록
하나님께 붙잡힌 온유와 겸손과 친밀함과 진솔한 삶

이어 발표한 김명혁 목사도 박윤선 목사와의 일화를 상세히 전했다. 그는 “박윤선 목사님은 누구보다 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가 12년간 유학생활 후 귀국해서 총신대 교수로 봉직하던 1979년 3월, 박 목사님께서 총신대 신학원장에 부임하셨다”며 “이후 저는 총신대에서 1년 7개월, 합동신학교에서 7년 7개월 동안 목사님을 가까이 모시고 함께 일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특별한 은혜와 축복이었다. 박 목사님은 제가 아주 존경하고 좋아하는 목사님이 되셨다”고 소개했다.

김 목사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박윤선 목사님과 상의하곤 했다. 박 목사님도 저를 퍽 좋아하셨다. 박 목사님은 시간에 상관 없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했다”며 “때로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박 목사님 입장을 교수들 앞에서 내세우다, 불필요한 오해와 반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저는 신앙적 감화와 인격적 감화 때문에 박 목사님이 언제나 좋았다”고 전했다.

그는 “박윤선 목사님은 인간적으로 소년처럼 단순하고 순박하고 정다웠고, 신앙적으로는 하나님만 아셨고 하나님께만 붙잡혀 사셨다. 언제나 ‘주여, 주여’ 고백하시면서 주님만 의지하고 사셨다”며 “금욕주의자는 아니셨지만, 다른 일에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농담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별세 얼마 전 서울대공원에 모시고 갔는데, 박 목사님은 동물들에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주여, 주여’만 하셨다”고 회상했다.

김명혁
▲김명혁 목사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이후에는 박윤선 목사의 삶을 3가지로 정리했다. 먼저 ‘기도에 전념하는 삶’이다. 그는 “하나님께 붙잡힌 그의 삶은 자연히 기도에 전념하는 삶으로 나타났다. 기도를 생활화하셨고, 기도를 쉽게 하지 않고 수고스럽게 하셨다”며 “매일 새벽 택시를 타고 총신대에 오셔서 뒷산에 올라 2-3시간씩 기도하셨다. 목사님은 택시를 타거나 대화하는 시간에도 간간히 ‘주여! 주여!’ 하며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곤 했는데, 영혼의 호흡 소리와 같이 들렸다”고 말했다.

김명혁 목사는 “1979년 총신대에서 학생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기도로 일관하셨다. 학생들이 이사회에 반기를 들고 이사들과 교수들의 자동차를 뒤집어엎었을 때도, 학교 책임자였던 목사님께서 학생 대표들을 불러 타이르거나 수습을 협의하는 대신 특별 기도회를 선포하시고 밤마다 강당에서 기도회를 인도하셨다”며 “저도 처음에는 불만이었지만, 며칠이 지나자 기도회의 효력이 나타났다. 학생들이 저마다 일어나 회개하기 시작했다. 기도로 일관한 박 목사님의 자세를 돌이키며, 저도 지금 그 길을 찾아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박 목사님이 마지막 1주일간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매일 찾아가서 뵙곤 했는데, 그때야말로 박 목사님께서 기도로 일관한 기간이었다. ‘산에 가서 기도하다 죽고 싶다’는 고백도 하셨다”며 “목사님은 찾아오는 분들을 위해 기도를 해 주셨는데, 그 모습에서 저는 순수한 인성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부르짖으며 주님 품에 안기셨다”고 했다.

둘째로 ‘말씀을 사랑하는 삶’이다. 그는 “박 목사님은 평생을 신·구약 성경 66권 주석 집필과 성경 교육에 바치셨다. ‘죽었다 깨어나 다시 한 세상을 산다 해도, 나는 목사가 되어 성경을 증거하겠노라’고 자주 말씀하셨다”며 “저는 평생 박 목사님의 주석을 애독하고, 설교를 준비할 때도 오직 목사님의 주석만 주로 찾아본다. 지금도 그 주석들을 여러 책들 중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며 가까이에 두고 자주 읽는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박 목사님은 성경을 하나의 성경 신학적으로 체계화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먹고, 말씀의 깊은 뜻을 발견하는 것을 최대의 기쁨으로 삼으셨다”며 “목사님에게 성경 말씀은 양식이요 생명이요 기쁨이요 보화요 등이요 빛이었다. 그의 주석과 설교에는 항상 새로운 영감과 통찰력이 나타났다.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무엇임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분”이라고 했다.

셋째로는 ‘하나님께 붙잡힌 온유와 겸손과 친밀함과 진솔함과 따뜻함의 삶’이다. 그는 “목사님의 얼굴에는 항상 진솔하고 따뜻한 소년의 미소가 깃들어 있었고, 가식이나 꾸밈을 모르는 진실이 풍겼다”며 “성역 50년 기념 논총을 증정받은 목사님은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라고 진솔하게 고백했고, 임종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 오해하는 소위 박 목사의 의를 모두 지워달라’고 처절하게 부르짖으셨다”고 털어놓았다.

김명혁 목사는 “훌륭한 분들 중에는 함께 있기 편하지 않는 분들도 있는데, 목사님은 함께 있기 너무 편한 분이셨다. 온유와 겸손과 친밀함과 진솔함과 따뜻함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날, 그것을 몸에 지니고 실천해 보여주신 분이 바로 박윤선 목사님”이라며 “목사님은 인간관계나 교파 또는 문화적 관계에 있어 폭넓고 포용적인 이해와 시야를 가지셨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는 “박윤선 목사님은 개혁주의적 삶을 몸소 올바로 실천하신 분이었다. 한국교회 안에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나, 대부분 근본주의 또는 극보수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며 “칼빈주의 신학은 하나의 신학적 체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 순수한 신앙과 삶의 원리로 나타남을 올바로 보여주셨다. 그리고 배타적인 분리주의가 아니라 긍정적인 포용과 교제의 삶임을 보여주셨고, 세상사에 무관심한 반(反)문화주의가 아니라, 구제와 선교 사역 등에 적극 관심을 나타내는 문화 변혁주의임을 올바로 가르쳐 주셨다”고 정리했다.

김 목사는 “그럼에도 박 목사님께서는 현세적인 정치·사회 문제에 치중하기보다, 사도 바울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도에, 말씀에 붙잡혀 하나님 중심적으로 평생 사신 분”이라며 “저는 평생 박 목사님 같은 스승을 만나게 하시고, 그 분과 일하게 하시고, 그 분으로부터 배우게 하시고, 그 분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