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설교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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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실용적인 글쓰기다

설교는 실용적인 글쓰기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설교는 인문학적 글쓰기라는 말이다.

설교는 학문적 글쓰기가 아니다. 설교는 논문도 아니다. 더욱이 성경 해석도 아니다. 성경 공부는 더더욱 아니다. 설교는 교인들이 들려질 수 있도록 하는 실용적인 글쓰기다.

설교자들이 설교가 잘 전달하기 위해 스피치를 배운다. 그 이유는 설교에서 전달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설교는 교인에게 들려져야 한다.

들려지는 글이 되려면 실용적인 글로 써야 한다. 그 이유는 실용적인 글을 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를 들을 때 듣기 곤란한 것이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한 것을 설교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설교가 아니다. 성경 풀이다. 설교와 성경 풀이는 구분해야 한다. 성경 풀이는 이해를 돕는 것에 그친다면 설교는 변화를 목적으로 한다.

설교는 전제 조건은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실용적인 글로 써야 한다.

예수님의 설교는 실용적이었다

예수님의 설교가 신학적이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실용적이었다. 교인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학문적이지 않고 생활적이었다. 그렇다면 설교자의 설교도 신학적이 아니라 실용적이어야 한다.

나의 예전 설교는 신학적이었다. 그리고 성경 해석적이었다. 용어 설명도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성경 풀이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교인들이 설교가 들려지지 않는다고 아우성쳤다.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는 신학적인 것 같다. 그럼 교인들이 설교를 애써 이해해야 한다. 설교는 애써 이해하려 하면 이미 실패다. 들을 때 저절로 들려야 한다. 그러므로 어려우면 안 된다. 쉬워야 한다. 신학적인 글쓰기는 어렵다. 실용절인 글쓰기는 쉽다.

나는 신학적인 설교를 준비할 때 코끝이 찡했다. 설교할 때 감동이 넘쳤다. 그 설교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 그리고 영광을 올려드렸다.

문제는 설교를 마친 뒤였다. 아내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행복한데, 교인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나만 은혜를 받았던 것이다. 교인들은 무슨 말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오늘 설교가 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설교자는 사명을 갖고 신학을 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설교를 하면 은혜가 풍성했다. 교인들은 신학을 하지 않았음은 물론, 설교자와 같은 사명이 없기 때문에 설교를 듣고 이해하는 것이 고역스럽다.

이전 설교는 성경공부나 개인 성경연구를 바탕으로 했다. 이와 같이 설교를 하면, 교인과는 무관하게 된다. 교인은 성경의 뜻이 아니라 나와 상관성을 따지지 때문이다.

또한 성경공부나 개인 성경연구를 바탕으로 설교를 하면, 설교자 수준에서 설교를 하게 된다. 설교자의 수준보다는 교인의 수준이 더욱 중요하다. 설교를 잘 하는 사람들은 교인들 수준에 맞춘다.

설교자들은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성육신’을 무척 강조한다. 하지만 자신은 ‘설교의 성육신’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들리지 않으면 교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이 없다고 한다.

설교는 교인 탓이기보다는 설교자 탓이다. 그것은 설교를 교인이 듣기 힘든 신학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설교는 실용적이어야 한다. 단, 설교의 메시지가 신학적이어야 한다. 설교의 중심 사상이 신학적이어야 한다.

신학적이란 말은 성경적 세계관이 담겨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는 복음이란 말이다. 하지만 채워지는 내용은 교인에게 들려지도록 실용적이어야 한다.

다른 설교자들이 내게 ‘설교란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설교는 삶’이라고 말한다. 설교는 삶이지 신학이 아니다. 삶이란 학문적이지 않고 실용적이다. 만약에 삶이 학문적이라면 학문을 하지 않은 사람은 교회를 나오지 말라는 이야기가 된다.

설교는 실용적인 글쓰기다. 예수님께서도 실용적인 글쓰기를 하셨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왜 실용적인 글쓰기를 하셨는가? 신학을 몰라서인가? 논문을 쓸 줄 몰라서인가? 아니다. 교인과 소통하기 위해서였다. 교인과 소통하려면 실용적인 글쓰기가 해야 됨을 아셨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신앙이 없다(?)

설교자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교인들이 신앙이 없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설교자들이 삶이 뭔지 모르는 것 아닌가?”

그들이 신앙이 없는 것이라기보다, 설교자가 신앙이 성장되도록 설교하지 못하기 때문 아닌가? 교인들이 설교자의 설교가 무슨 말이지 모르는데, 설교가 들려지지 않는데, 어떻게 신앙이 성장하겠는가? 그 결과 설교자만 신앙이 성장하는 것 아닌가?

전에 나도 신학적으로 설교를 했다. 하지만 교인들이 설교가 들려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뒤, 실용적인 글쓰기로 바꿨다. 그 후 교인들이 설교가 들려진다 했음을 물론 설교를 듣고자 하는 욕구가 많아졌다.

최근 ‘아트설교연구원’ 한 회원과 통화를 했다. 최근 목회가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실용적인 글쓰기로 바꾼 뒤 설교가 들려지니, 교인들의 변화가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교인들인 신앙생활을 행복해 한다는 것이다. 작게나마 불신자들이 교회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이다.

팀 켈러, 실용적인 글쓰기로 설교를 한다

최근 한국 강단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설교자가 미국 리디머 교회 목회자였던 팀 켈러다. 그의 설교 글은 학문적이지 않고 실용적이다.

팀 켈러 목사의 책은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린다. 그가 주장하는 센터처치 운동의 중심에는 ‘설교’가 있다. 그가 실용적인 글쓰기를 통해 교인들이 신앙성장에 도움을 받고 있다면, 실용적인 글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팀 켈러 목사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신학자이기도 하다. 즉 그는 탄탄한 신학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설교를 할 때는 실용적인 글로 교인들에게 다가간다. 그의 설교를 교인들이 좋아하는 것은 실용적인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설교자에게 고수와 하수가 있다면, 하수는 신학적인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고수는 신학을 근간으로 한 실용적인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실용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설교의 고수가 될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최근 출판사 관계자로부터 설교집을 출간할 때 어떤 식으로 편집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조언하길, 설교집이 에세이 형식을 띠어야 교인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그에 따르면, 교인은 설교집은 외면 대상 1호다. 그래서인지 설교자들이 ‘설교집 읽어보는 사람 있어?’라고 한다. 옥한흠 목사는 설교를 준비할 때, 설교집을 많이 읽는 것을 과정에 집어넣었다.

출판사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신학적인 설교 글이 아니라 실용적인 설교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실용적인 설교 글쓰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높은 수준의 신학적 배경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럴지라도 신학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신학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이에 못지 않게 할 것이 있다. 실용적인 글쓰기다.

나의 임상경험에 따르면, 설교자들은 실용적인 것보다는 신학적인 것이 수준이 높다. 그러므로 신학교에서 교수가 될 것이 아니라면 실용적인 글쓰기를 해야 한다. 실용적인 글이 교인에게 설교가 들려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개인 브랜드 시대다. 개인 브랜드를 만드는 최적의 방법이 글을 쓰는 것이다. 쓰되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 글을 통해 교인과 소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설교자는 설교 글을 잘 쓸 줄 알아야 한다. 그 글은 실용적인 글이어야 한다.

논리적인 글을 넘어 공감적인 글쓰기로 나아가라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의 한계를 절감한다고 말한다. 한계를 절감하는 것은 설교자의 글쓰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먼저 쓸 글은 논리적인 글이다. 그 다음 쓸 글은 감성적인 글이다. 종종 듣는 말 중 하나가, 감성적인 글쓰기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설교 글쓰기는 먼저 논리적인 글쓰기부터 시작된다. 그 다음 공감하는 글쓰기다. 공감하는 글은 논리적인 글쓰기 다음 단계의 글쓰기다. 그만큼 감성적인 글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즉 감성이 담긴 설교에 대해 폄하하는 것은 글쓰기가 뭔지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은 남다른 감성을 지녔다. 아마 한(恨)의 문화와 흥(興)의 문화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감성이 담긴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감성적인 글을 써야 하는 것은 교인이 설교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반응한다. 변화는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선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감성적인 글쓰기까지 나아가야 한다.

감성적인 글쓰기까지 나아가는 것은 교인들의 필요와 원함을 채워주는 것이다. 문제는 설교자들은 교인들에게 맞추는 것을 상당히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책을 다했다라고 생각한다.

독불장군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맞추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는 사명이다. 예수님은 사명감을 갖고 성육신하셨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설교의 성육신을 해야 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자주 듣는 말이 있다. ‘고객은 왕이다’는 말이다. 우리 동네에는 ‘고객은 왕 약국’이 있다. 나의 생각에는 고객을 왕처럼 대우하겠다는 결단인 것 같다.

영화 <호텔 뭄바이>에서는 ‘고객은 신이다’라고 한다. 설교자는 고객은 왕이나 신과 같이 여기는 자세로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설교 글을 써야 한다. 그럴 때 교인은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된 삶을 추구할 것이다.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 《설교는 인문학이다/ 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 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 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 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 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 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