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창가에 서서 지난날의 추억에 잠겨 있던 남궁억 교사는 씩 웃었다. 관자놀이 께가 살짝 붉어진 듯도 했다.

첫날밤의 기억은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자신만의 아름다운 추억이리라.

그 후로 양씨 부인은 정말로 집안과 남편의 해님이 되어 주었다. 궁색하던 오두막집이 환해졌다.

남궁억도 이제 청소년 티를 완전히 벗고 한 명의 청년이자 가장으로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그런 틈틈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시내에 나갔다가 관공서 앞의 게시판을 훑어보던 남궁억은 어떤 광고문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 생긴 관립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에서 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였다.

그 무렵은 서양 문물이 빠르게 들어오면서 세상은 아주 다른 모습으로 새로워지던 시기였다.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던 사람들은 그 새로운 변화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눈앞의 사태를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자신도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도 있었고, 외래 문화란 옛것을 무너뜨리는 도깨비라고 두려워하면서 낡은 전통을 악착같이 지키려는 세력도 있었다.

구태의연한 정치가들은 당파싸움이나 하면서 아까운 세월을 흘려 보내었고, 백성들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자기네들의 이익만 탐했다.

정신 빠진 양반 사대부들은 사대주의에 빠져 큰나라인 중국을 섬기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자고 주장했다.

외세의 침략도 문제였지만 우리 내부가 너무 썩어 있었다. 고목나무의 속이 썩으면 바람만 살짝 불어도 저절로 무너지는 법이다.

언젠가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소견 좁은 아낙네라서 이런 소릴 하는 건 아니다. 대국이니 대인이니 하며 크다고 해서 다 옳은 건 아니다. 과대망상에 빠져 허풍이나 떠는 건 소인의 섬세함보다 오히려 못하다.”

남궁억은 나라가 돌아가는 꼴만 생각하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자신도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했지만, 거기엔 좋은 점도 있으되 한편으론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입으로만 공자왈맹자왈 읊어대는 한심스러운 점도 있었던 것이다.

남궁억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허례허식보다는 현실생활에 필요한 것을 중시하고, 말보다는 실천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제 우리나라도 넓은 세상의 현실을 바로 보고 변화해야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리라. 다만, 서양의 좋은 점은 받아들이되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도 더욱 소중이 여겨 갈고 닦아야 한다.”

그는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청춘의 피가 가슴속에 뛰노는 남궁억은 새로운 변화의 물결 앞에서 많은 생각을 한 후 나름대로 결심을 하고 있었다.

앞선 외국의 과학기술 문명을 외면만 하다가는 언젠가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었다.

남궁억은 호기심이 생겨 광고문을 두세 번이나 읽었다.

동문학은 우리나라가 서양의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맺고 자주 교섭을 갖게 되면서, 영어로 말할 줄 아는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정부의 외국인 고문으로 초빙되어 온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운 그 학교는 서울 재동에 있었으며 학비는 무료였다.

남궁억은 어떤 설레임을 느껴 무척 흥분된 표정이었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어스름 녘에 집으로 돌아온 남궁억은 저녁을 먹은 후 바느질하는 아내의 옆으로 갔다.

“임자, 내게 시집와서 늘 이렇게 고생만 하는구려.”

“당신도 열심히 하시니까 난 오히려 행복해요.”

양씨 부인은 차분히 말했다.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생겼다더군. 한 번 지원하려 하는데 임자 생각은 어떻소?”

“뜻이 확실하면 하셔야지요.”

“격려해 줘서 고맙구려.”

그리하여 남궁억은 1883년에 스물한 살의 나이로 동문학에 입학했다. 남궁억과 함께 입학한 학생은 30여 명이었다.

학생들의 차림새는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걸치는 등 신식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려는 청년들치고는 퍽이나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첫 시간에 교사가 말했다.

“여러분은 앞으로 이 나라의 눈과 입과 귀가 되어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임무가 막중하지요. 모두 열심히 하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영어회화 공부부터 시작했다. 실무적인 통역을 유창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굿모닝. 왓 이즈 유어 네임?”

“마이 네임 이즈 억 남궁.”

그러나 수업 진행은 한계가 있었다. 기본적인 영문법이 갖쳐져야만 회화도 실제 상황에서 빠르게 응용이 되기 때문이었다.

남궁억은 등하교 길에 걸어다니면서 영문법의 규칙을 외우고 또한 좋은 영어 문장을 골라 통째로 중얼중얼 암송했다.

“보이즈 비 앰비셔스(소년아 야망을 가져라)!”

동네의 젊은 동무들이 손가락질하며 놀려댔다.

“에이 비 씨 디… 굿 모닝… 그게 꼬부랑말이니? 괴상망측한 말을 하니까 사람까지 괴상해 보이는구나. 꿀꿀 하면 돼지, 움머 하면 송아지지롱. 헤헤헤.”

“돼지는 소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

남궁억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 말 같지도 않은 영어는 배워서 무엇에 쓴다고 그래. 미국 사람들의 종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남궁억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얘들아, 내 말을 들어봐. 선진국과 함께 발전하려면 우선 그네들과 말이 통해야 할 것 아니냐? 안 그러면 속아서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어.”

“글쎄, 아무튼 쉬운 우리말을 놔두고 왜 어려운 영어를 공부한답시고 생고생이냔 말야.”

“세계는 급속하게 발전해 가는데 우리만 우물 속에 가만히 앉아 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약한 나라가 되어 잡아먹힌단 말야.

너희들도 저 동구 밖의 대못 박힌 소나무를 알고 있겠지? 힘이 약해 왜놈들에게 당한 우리네 가슴의 상처라고 할 수 있어.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돼.”

남궁억은 말하며 자기 가슴을 쳤다. 친구들은 더 이상 놀리지 않았다.

남궁억은 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했으며, 시간을 내어 잘 따라오지 못하는 학우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혼자만 앞서 나간다는 건 옳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해력과 기억력이 좋은 그는 교과서를 학습한 뒤엔 도서관에서 명작소설이나 시를 영어로 읽기도 했다. 그는 무작정 공부하지 않고 영어의 특징을 잘 파악한 뒤 그에 맞춰 읽고 쓰고 말하기를 반복했다.

동문학에서는 영어 외에도 일본어와 서양의 수학을 가르쳤다. 남궁억은 모든 과목을 열심히 공부해서 1년 후 수석으로 동문학을 졸업했다.

남궁억은 졸업 후 총해관의 외교 고문을 맡고 있던 묄렌도르프의 추천으로 한성부 총해관의 견습생이 되었다. 총해관은 요즘의 세관 같은 곳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는 태도로 그는 실무를 차근차근 익혀 나갔다. 처음엔 좀 낯설었지만 차츰차츰 익숙해졌다.

남궁억은 학교에서 쌓은 영어 실력을 총해관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묄렌도르프는 남궁억의 영어회화 능력을 무척 칭찬했다.

더구나 그는 사무를 처리하는 능력까지 신속 정확했으므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큰 신임을 받았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