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기독교 신앙에 있어 율법은 ‘뜨거운 감자’다. 종교개혁의 핵심주제인 이신칭의도 사실은 율법 문제와 연관됐고,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니 구원파니 하는 이단시비도 율법과 연관돼 있다. 어쩌면 모든 신학 논쟁이 직간접으로 율법과 관련돼 있다 고 볼 수 있다.

성경에는 ‘믿음’ 만큼이나 ‘율법’ 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직접적으로 언급된 것 만 200회 이상이고 계명, 율례, 규례 같은 간접적인 용어들을 다 포함한다면 수백구절이 넘는다. 이는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인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으며, 율법을 간과한 채 신앙을 논할 수 없다 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신학적인 문제도 그렇지만 ‘율법’ 문제도 ‘해석학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아래의 몇 주제는 해석상 논쟁을 야기할 만한 내용들인데, 이들에 대한 정확한 해석만으로도 혼란의 야기를 막을 수 있어 보인다.

◈율법 아래 죄 아래

우리는 심판이 오직 죄 때문에 온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전제대로 우리는 ‘죄 아래 있는 자’가 ‘심판 아래 있는 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이전에 ‘율법 아래 있는 자(롬 3:19)’와 ‘심판 아래 있는 자’를 함께 묶었다. 죄를 죄 되게 하는 것이 율법이기에, ‘율법 아래 있음’과 ‘심판 아래 있음’을 동일시한 것이다.

‘율법’은 ‘죄’뿐 아니라 그 반대 개념인 ‘의’와도 당연히 연루된다. ‘율법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은 ‘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말이고, ‘율법을 이루었다’는 말은 ‘의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율법을 이루지 못해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의를 이루지 못해 심판을 받는다’는 말로, ‘율법을 이루어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의를 이루어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이는 의가 없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만 율법이 세력을 떨친다(롬 3:19)는 성경 말씀에서도 보증을 받는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지 않는 자들에게 율법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할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공고히 하려고 ‘율법 없인 죄도 없고(롬 5:13)’고,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롬 7:8)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개개인의 율법 완성 여부는 자신의 노력이나 시대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신앙 안에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스도 강생(降生) 전의, 구약시대 성도들일지라도 그리스도 신앙 안에 있으면 율법아래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일지라도 그들이 그리스도 신앙 밖에 있으면 율법이 성취되지 않아 여전히 율법아래 있다.

◈믿음과 율법은 배치되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는 말씀 역시 혼란을 겪게 하는 구절 중 하나이다.

‘언약적 신율주의자(covenantal nomism)’들은 초대교회에 바울로 말미암아 이신칭의의 새 경륜이 도입됐지만, 그것이 이전의 율법적 해위를 폐기한 것이 아니라 더욱 공고히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믿음’이 사람들이 행하는 불완전한 율법적 행위를 보완시켜 율법을 성취시켜주므로, 그들로 하여금 그것에 고무받아 율법적 행위에 더욱 집착하게 만든다(굳게 세운다)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율법 행위의 수준이 10 중 6-9정도일 때 모자라는 1-4를 믿음이 보완해 구원을 이루어 주기에, 믿음이 사람들에게 율법적 행위를 하도록 부추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믿음은 사람들의 불완전한 율법 행위를 완전케 하는 ‘사사오입’의 방편인 셈이다. 이들의 ‘율법적 행위’는 이신칭의자(以信稱義者)들이 값없이 주신 구원에 감사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이들의 주장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폐해지지 않고 세워진다’는 말씀은 ‘믿음’과 ‘율법적 행위’를 합쳐 구원을 완성시킨다는 상호 보완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믿음’과 ‘율법’이 ‘각각의 독자적 완전으로 서로의 완전성을 입증해준다’ 혹은 ‘둘이 서로를 세워주며 각각의 독자적 완전을 구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율법의 완전함’을 보증해주고, 그리스도가 이룬 율법이 ‘믿음의 의의 완전함’을 보증해 준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는 말씀이 그것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그리스도의 율법 완성이 ‘믿음의 의’를 가능하게 하고, 믿음이 그리스도가 이룬 ‘율법적 의’를 전가 받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전가 받는 의는 그리스도가 이룬 완전한 율법의 의이기에, 믿음이 높여질 때 율법도 높여지며 율법이 높여질 때 믿음도 높여지도록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8)’라는 말씀 역시 설명을 보완해 준다.

그리스도의 율법 완성으로 된 복음이 오직 믿음만 요구한다 는 뜻이지, 율법 성취와 무관한 복음이 믿음만 요구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믿음’이 높여질 때 자연히 ‘율법’도 높여진다.

◈율법이 폐해졌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시사받을 수 있듯, 그리스도가 율법을 폐했다(엡 2:15)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폐기처분 했다는 말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율법을 완성시키므로 ’율법의 정죄 기능‘을 폐했다는 뜻이다.

이를 진전시키면, 율법의 완성자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는 더 이상 율법의 요구를 받지 않아 그에게서 율법의 정죄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는 말로 표현했다.

반면 율법의 완성자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는 율법이 그를 정죄한다. 그는 율법 완성의 기반인 그리스도 위에 서 있지 않기에 그가 딛고 섰는 곳은 그를 죽음에 빠뜨릴 교수형(絞首刑) 의자가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는 말씀 역시, 그리스도가 율법을 폐지했다거나 우리를 율법(죄와 사망의 법)이 없는 세계로 끌어내 주었다는 말이 아니다.

세상 어디에도 율법이 지배하지 않는 곳은 없다. 지옥 끝에도 율법이 지배한다. 율법의 의가 없는 그곳은 율법의 정죄로 끝없이 형벌이 집행된다. 심지어 천국도 율법이 지배한다. 그러나 이곳은 지옥과는 달리 어린 양 그리스도의 피로 율법이 성취된 곳이기에 의의 화평이 통치한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더 첨가하고자 한다. 첫째 사도 바울이 말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롬 3:21)’이다. 이는 율법을 대체한 다른 의(義)가 도입됐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완전한 율법적 의를 말한 것이고, 이는 이미 창세전부터 예비 됐던 것이다.

전자는 죄인의 행위에 기반 된 불완전한 율법적 의라면, 후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하나님의 의(義)이다.

전자가 죄인이 성취하기에는 불가능한 ‘율법의 의’,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한에서만 유지됐던 타락 전 아담의 의(義)라면, 후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영원불변한 의이다.

죄인에게서 ‘율법의 의’가 성취될 수 없음을 아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이룬 ‘하나님의 의'를 준비하셨고, 죄인이 믿음으로 그것을 전가 받게 하셨다(롬 3:22).

둘째,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씀 역시 율법을 폐하는 방식이나 혹은, 율법이 아닌 전혀 다른 방도로 구원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곧 그리스도가 완성한 율법의 의를 믿음으로 전가받아 구원받았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율법 완성이 없었다면 믿음으로의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이신득구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에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 보건대 믿음을 높이는 이신칭의론자들보다 율법을 영화롭게 하는 이들이 없으며, 그들이 율법폐기론자(Antinomian)로 매도되는 것은 누명이고 허구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 밖에 율법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믿음을 높일 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