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정호승
▲정호승 시인(왼쪽)과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나는 목회자이면서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시를 쓰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많고 때로는 광장에서 수많은 군중 앞에 사자후를 토하는 검투사형 웅변가이기도 하다. 목회 일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면 시에 집중하기가 힘들어 아쉬울 때가 많다. 좀 더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꼭 한번은 정호승 시인에게 직접 시에 대한 강의를 듣고 싶었다. 나에게 있어서 시에 관한 한 그는 대기권 밖의 존재이다. 그의 시에는 문학적 기교와 예술적 혼만 있는 게 아니다. 시대에 대한 고민과 아픔이 깃들어 있어 위로가 됐다.

정호승 시인은 우리 교회에 와서 사랑과 죽음의 본질에 관한 인문학 특강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아니었기에 그분의 시 강의를 개인적으로라도 받고 싶었다. 그런데 그분이 먼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목사님께서는 시를 쓸 때 제목부터 정하고 내용을 씁니까? 아니면 내용을 쓴 후 제목을 정합니까? 그리고 시를 쓸 때 정말로 아픔과 고통을 느낍니까?"

그 분의 물음에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았다. "저는 선생님처럼 전문 시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삶이 너무 치열하고 바빠서 주로 비행기나 차에서 이동 중에 씁니다. 그러다 보니 시 쓰는 고통을 많이 느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먼저 본인이 느끼는 시 쓰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시 창작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시를 쓰는 것이야말로 고통입니다. 시작을 위한 메모 과정부터 그것을 시로 옮기고 다시 수정하고 또 수정하면서도 이 시가 과연 얼마나 독자의 심금을 울릴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그러므로 시는 고통으로 시작해 고통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저도 언제쯤 시 쓰기의 고통에서 해방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사람의 마음을 더 감동시키고 시의 꽃밭을 이뤄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고통의 극지를 경험하셔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자신은 시를 쓸 때 제목부터 정하고 내용을 쓴다고 말했다. 내용을 쓰고 제목을 정하게 되면 시대 혼과 시인의 아픔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역시 아무리 아름다운 시라 할지라도 그 속에 시대 혼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순수 서정시라 하더라도 그 속에 시대에 던지는 예언자적 혼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제사장적인 정신도 들어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 사상에서 시인의 가슴은 신전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그리스 사상에서도 시인을 하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얘기했다.

그분의 강의를 들으며 너무 부족함을 느꼈고 심지어는 '내가 가짜 시인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득 윤동주의 무덤 앞에서 썼던 시가 떠올랐다.

"님의 무덤을 찾아오지 않고서야 / 어찌 시인이라 할 수 있으랴 / 그대처럼 아파하지 않고서야 / 어찌 시를 쓴다 할 수 있으리요 / 부끄러움 하나 느끼지 않고 시를 썼던 / 가짜 시인을 꾸짖어 주십시오 / 눈물 없이 쓴 껍데기 시를 / 심판해 주십시오 / 참회록 없는 이 시대의 시인들을 / 파면해 주십시오 / 당신 무덤에 피어오른 동주화를 / 내 마음의 무덤에 심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강의를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출판을 준비하고 있던 시들을 적지 않게 수정했다. 처절하리만큼 바쁘게 사는 나에게 있어서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부끄러움, 고통, 눈물, 잔인한 사명, 가시 찔린 사랑, 꽃잎과 꽃잎이 마주하며 별들로 사랑을 속삭이게 하는 것일까.

정호승 시인은 말했다. 시는 은유의 옷을 입고 자신의 상처와 고통, 외로움을 드러내며 비극적 황홀에 도달하는 과정이라고, 그리고 그 비극적 황홀을 통해 인간과 신과의 관계 속에서 숨겨진 비의를 노래하여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라고. 그분 덕분에 나는 시인으로서 또 한 번 거듭남을 경험하였다.

* 샘터 5월호 '소강석 목사의 행복 이정표'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