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국제질서, 3·1운동과 임정 수립에 영향
윌슨, 제국주의 끝내고 자유민주주의 전하려
기독교적 가치에 따라 민족자결주의 외쳐

한국복음주의신학회 박명수
▲이날 주제발표를 맡은 박명수 교수(오른쪽 두 번째)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73차 정기논문발표회가 '교회와 민족: 과거, 현재, 미래'라는 주제로 27일 한국중앙교회(담임 임석순 목사)에서 개최됐다.

이날 박명수 교수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에 미친 영향-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했다.

박 교수는 "우리는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수립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며 "3·1운동과 임시정부는 다같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질서가 새롭게 개편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이어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국제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열세에 몰리던 연합국은 미국의 막강한 후원에 힘입어서 전세를 회복하게 되었고, 독일은 항복하고 말았다"며 "결국 미국의 노력으로 연합국은 승리를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새롭게 국제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한 인물이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이제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게 되었고, 그 정치체재는 민주주의였다. 제국주의가 종식되고, 민주주의가 확산되는 새로운 시점에 오게 된 것"이라며 "윌슨은 과거의 제국주의를 끝내고, 자유민주주의적인 국제질서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동맹국의 식민지뿐만이 아니라 당시 세계의 수많은 약소국가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이집트, 알메니아, 이슬람 국가, 인도, 중국, 월남, 한국에 이르기까지 세계사회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며 "이는 미국이 갖고 있는 이미지 때문"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당시 세계는 미국을 유럽제국과는 다른 민주주의 국가이며, 동시에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나라라고 생각했다"면서 "이런 미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는 당시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던 미국 기독교 선교사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미국 선교사들은 각 민족에게 들어가서 그들의 형편에 맞는 선교정책을 세우고, 그들의 민족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그는 "실질적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토만-터키는 알메니아의 150만명에 이르는 기독교인들을 학살하였다"며 "이것은 그곳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 특별히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고 했다.

박 교수는 "선교사들이 기록한 알메니안 대학살에 대한 기록은 윌슨으로 하여금 1918년 1월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한 14개조의 원칙을 주장하는데 중요한 확증을 갖게 만들었다. 이 연설은 지역주권과 소수인종의 보호를 미국의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고 했다.

그는 "사실 윌슨과 선교사들의 관계는 오래 되었다. 윌슨은 오래 동안 장로교신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장로교목사였으며, 그 자신은 장로교대학인 프린스턴대학교의 총장으로 장로교의 평신도 지도자였다"며 "윌슨은 자기 이전의 미국 대통령들이 경제를 외교의 핵심에 두는 것을 반대했다. 윌슨은 국제정치에 있어서 도덕적 이상을 추구했다"고 했다.

박 교수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기독교 정신은 민주주의 기초이며, 이것은 피통치자의 동의에 기초한 계약, 즉 법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며 "따라서 그의 국제외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힘이 아니라 도덕이었다. 아울러 윌슨은 모든 개인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듯이 모든 국가는 강국이든지 그렇지 않은 국가이든지 국제사회에서 같은 권리를 가진다는 '국가의 동등성'(equality of nations)을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주, 일본, 상해, 그리고 국내의 각종 청원서 및 선언문을 통해 당시 우리가 어떤 국가를 만들기를 원했던 것인지를 살핀 박 교수는 "그것은 윌슨이 주장하는 국제질서에 편입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며 "이렇게 본다면 1919년 4월 초 임시의정원이 어떤 방향으로 국가건설을 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이 모임에 참여했던 여운형은 자신은 임시헌장을 제정하는 자리에서 민주공화제, 기독교주의, 인간존중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 국가건설을 주장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또 임시정부 헌장의 내용을 분석한 박 교수는 "첫째,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을 신의 뜻에 의해서 성립된 나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에는 기독교 국가를 만들겠다는 의식이 분명하게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둘째,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이 윌슨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맞추어서 성립된 것이라는 것"이라며 "즉,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인류평화에 기여하는 것을 추구한다. 셋째, 대한민국은 모든 정치 행위는 피통치자의 동의에 근거해서 통치되는 근대적인 민주질서에 충실한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고 했다.

박 교수스는 "넷째, 대한민국은 크게 보아서 미국의 헌법을 따라 만들었다는 것"이라며 "물론 대통령제에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보아서 대한민국은 대의제, 권력의 분립,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 등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따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다섯째, 대한민국 헌법은 봉건계급과 인민계급의 모두를 부정하는 보편적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여섯째, 권력은 의정원은 입법권을, 임시정부는 집행권을 가짐으로써 권력의 집중화를 막는다. 일곱째, 종교의 자유 및 개인의 소유권을 포함한 인간의 기본권을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한다. 여덟 번째, 일본이 남긴 여러 가지 잔재를 해소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로 그 내용을 요약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신학회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
박 교수는 "지금까지 한국사 학자들이나 정치사학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적 기원을 주로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이나,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의 연속산성에서 살펴보았다. 이것은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를 그 이전 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운동의 연상선상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했다.

그는 "하지만 이런 노력은 위의 선언서가 실질적으로 국내외 동포들에게 별로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인하여 새롭게 전개되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데에 한계가 있다"며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후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려고 했던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보다 직접적으로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고 했다.

박 교수는 "윌슨은 기독교적인 계약사상에 바탕을 둔 서구 민주주의의 원칙,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동의에 근거해서 통치해야 한다'는 원칙에 의거해서 민족자결주의를 외쳤다"며 "이런 정치철학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미국식 민주주의, 곧 자유민주주의이며, 미국은 이것을 온 세계에 전파하고자 했다. 윌슨은 이런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전파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윌슨에게 있어서 기독교와 민주주의는 결국 동전의 양면이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