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룟 유다인가? 굳이 가룟 유다가 필요했나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중요한 실존 사건
‘재판’ 거친 심판 결과로서의 ‘죽음’이어야 했다
영적 기소자, 가룟 유다가 바로 그 역할 자처해

‘최후의 만찬’ 하면 대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주제로 그린 그림들 중 효시가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이 주제는 플로렌스 지역 예술가들에게 단골 주제였다. 왜냐하면 그 지역에 수도원이 30여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그 수도원들 식당에 걸던 그림의 주제였던 것이다.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누가 그린 가룟 유다일까?

가룟 유다, 이 그림의 인물 상을 먼저 유의해 둘 것.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1. 무명. Last Supper, Mosaic, VI century, Ravenna Sant'Apollinare.

유월절 기간에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 사도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셨다는 이 주제로 그린 가장 오래된 작품은 이탈리아 라베나(Ravenna)에 있는 산타 아폴리나레 누오보(Sant'Apollinare Nuovo)성당의 모자이크일 것이다. 493년 이탈리아에 동고트(Ostrogothic) 왕국을 창건한 동고트 왕이 526년까지 통치하면서 세운 교회였다.

밀도감이 떨어지는 모자이크 양식이지만, 단번에 이 그림에서 세 사람이 눈에 띈다. 12명의 사도와 함께하는 스승 예수, 예수님 품에 안긴 제자, 수건을 들고 가는 제자. 그리고 그 외의 제자들이 평범하게 둘러 앉아 있다.

이 중에 가룟 유다는 누구일까. 이 무명의 작가는 분명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유다를 위치시키고 있다. 여러분도 찾아보시기 바란다. 누굴까.

모자이크로 된 이 처음 작품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간의 표현력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다빈치는 결코 이 첫 작품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평면적 배치를 유지함으로써 모든 인물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한 점은, 얼굴을 보고 제자들의 충성도에 점수를 매기라는 것일까? 가장 큰 창조적 변화는 예수님이 가장 측면에서 정중앙으로 자리가 바뀐 점이다. 르네상스다운 정위치이다.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2. Giotto, Last Supper (a 1305), Padua Scrovegni Chapel.

우리에게 언제나 백색의 신비로움을 선사하는 지오토(Giotto)는 14세기 화가이다. 사도들의 다양한 겉옷 색상을 통해 가룟 유다를 드러냈다.

노란색은 중세의 속임수를 상징하는 색이다. 사료에 따르면 이 그림을 주문한 클라이언트(엔리코)는 부호의 아들로서 엄청난 부를 누렸는데, 그의 재력과 사치 덕택에 예술가들은 교회 작품을 통해 천재성을 드러낼 수 있었고, 우리가 그 작품을 보는 것도 다 그런 재력가들 덕택이다. 그러나 단테는 신곡에서 그를 지옥에 떨어뜨렸다.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3. Pietro Lorenzetti, Last Supper (1310-1320) Assisi Lower Basilica.

피에트로 로렌제티도 14세기 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최후의 만찬 한 점을 그렸다. 지오토가 영적 관심을 표현했다면, 그는 부엌을 한 칸 마련하여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뒤숭숭한 분위기를 실제적으로 극대화하고 있다.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4. eato Angelico, Communion of the Apostles (1440-1442), Florence San Marco Monastery.

15세기로 넘어와 수도사이면서 화가였던 안젤리코(Angelico)를 통해, 앞선 작품들과는 좀 다른 도상이 등장한다. 예수께서 떡을 일일이 먹여주는 것이다. 다분히 가톨릭의 성례로 재구성한 결과이다.

여기서도 배신자 유다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앞서 지오토와 로렌 제티의 그림에서 유다는 중세시대 불량함의 상징인 붉은 색 머리카락(그림에선 컬러 미비)이지만, 안젤리코의 도상에 와서는 머리카락과 턱수염이 아주 과도할 정도로 짙은 검정색으로 변해 있다.

그런데 성찬 참여에 대기 중인 다른 세 사도와 동일하게 참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찬례에는 배신자도 참여할 수 있다는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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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Dieric Bouts, Tryptich of the Eucharist (1464-1468) Leuven St Peter Church.

그동안의 중세 화풍이 뚝 끊기는 것은 디에릭 보우츠(Dieric Bouts, 1415-1475)의 작품에서다.

우선 인물들의 후광이 없다. 식탁을 차린 공간도 종전과는 좀 다르다. 이 가옥은 네덜란트 풍 연와로 지은 가옥의 전형이다. 현실감 있게 공간을 바꾼 것이다.

배신자 유다의 검은 색 헝클어진 머리는 다른 사람보다 눈에 띈다. 특히 다른 사람은 ‘기도 손’을 하고 있는데, 벗겨진 겉옷을 다시 걸치려 하고 있다(그러나 다시 걸치기 어려운 것 같다).

우측 기둥 옆에서 주홍색 모자를 쓴 남성은 화가 자신임이 후대 해석가들에 의해 밝혀졌다. 그는 이 작업에 4년이 걸렸는데, 400명 규모의 인력이 투입돼야 하는 규모 건축공사의 십장들이 받는 규모의 대금을 챙겼다고 전해진다(일부러 오래 그렸나).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6. Taddeo Gaddi, Last Supper and Crucifixion (1333), Florence Santa Croce.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가장 직접적으로 참조했을 것 같은 작품. 십자가 도상과 함께 한 세트로 그린 타대오 가디(Taddeo Gaddi)의 작품이다.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7. Andrea del Castagno, Last Supper (1447) Florence Monastery of Sant'Apollonia.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7번 작품을 확대한 모습.

그의 저런 구성이 100년 뒤 안드레 델 카스타그노(Andrea del Castagno)의 작품에 복고되고 있다. 두 작품의 특징은 역시 유다. 유다가 홀로 반대편에 앉아 있다. 머리카락은 마치 까마귀와 같다.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8. Domenico Ghirlandaio, Cenacolo of San Marco (a. 1480), Florence Monastery of San Marco.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8-2. Domenico Ghirlandaio, Cenacolo of San Marco (a. 1480), Florence Monastery of San Marco.

다음은 미켈란젤로의 스승인 도메니코 비고디(Domenico Bigordi)의 작품. 그는 같은 작품을 두 개 그렸는데, 하나는 인물들에 후광이 있고 다른 하나에는 후광이 없다.

후광이 있는 작품에서는 가룟 유다를 후광 없음으로 드러냈는데, 모두에게 후광이 없는 작품에서는 동작으로 가룟 유다를 표시한다.

또한 후광이 있는 작품에서는 고양이를 유다 옆에 둠으로써 도식적인 악의를 표시했지만, 후광이 없는 작품에서는 관객의 해석을 유도한다.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9. Perugino, Cenacolo of Fuligno (1485), Florence.

15세기 후반 화가 페루기노(Perugino)의 작품에서 가룟 유다는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바로 관객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9번 작품을 확대한 모습.

이것은 변명인가? 자신의 필연적 행동에 용서를 구하는 것인가? 예수께서는 이 일이 정해져 있다 하였다. (무엇이 정해졌다는 걸까?)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10. Leonardo, Last Supper (1494-1498), Milan Santa Maria delle Grazie.

자, 이제 그 다음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해석을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 그림은 80% 이상이 복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 작품은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이다. 그런데 이미 1500년대부터 산/풍화가 많이 진행돼 덧칠해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10번 작품을 최근 복원한 모습.

가장 결정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벽이 박살이 났다는 사실이다. 관광 상품일 뿐, 사실상 현존하지 않는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11. POURBUS, Pieter, Last Supper (1548), Groeninge Museum, Bruges.

우리가 약 10개의 작품 전개를 보았는데 이 테마의 중심주제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주님과의 마지막에 애잔한 애찬을 하였다는, 그래서 성찬의 유래이다!

바로 성례전이 주제일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작품들에서 본 것처럼 이 주제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가룟 유다이다.

여러분은 ‘가룟 유다’, 하면 궁금한 적 없으셨던가? 왜 가룟 유다인가? 굳이 가룟 유다가 필요했을까?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중요한데, 그냥 ‘죽음’ 그 자체면 되었지 왜 가룟 유다인가?

물론 역사적 가룟 유다가 팔아 먹은 일, 그게 한이 되어서, 그게 주제일 수 있는 것이지만, 정말 그 이유가 다일까?

기독교에 있어 예수님의 죽음은 대단히 중요한 실존의 사건이다. 피 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죽음이 ‘사고사’ 같은 거라면 안 되는 것이다. 전쟁 나가서 죽는 ‘전사’이서도 안 된다. 누가 억울하게 ‘독살’을 했다. 그것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떤 죽음이어야 하느냐. 반드시 ‘처형’이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 바로 ‘재판’을 거친 심판의 결과로서의 ‘죽음’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왜? 인류의 대속/구속이라 함은 법정적인 일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성황당에 돼지머리나 돈을 내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법정적’ 유/무죄로서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런데 이 법정이 성립되려면, 로마 제국의 권력, 또는 유대인 제사장들의 권력의 힘, 이런 걸로 성립이 되는 것 또한 아니다.

가령 공산당이 지주를 인민재판했다. 그것이 법정적(포렌식) 능력이 있느냐? ‘모함’을 당해 죽는 것, 그러한 단지 ‘억울한 죽음’은 ‘사고사’와 크게 성격이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이 있는 그런 법적 재판이 열려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재판이 구성되려면 어찌해야 되는가. 바로 기소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영적 기소자, 바로 가룟 유다가 그 역할을 자처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해 복음서에는 흥미로운 진술이 나온다.

요한복음에서는 ‘마귀가 생각을 넣어주었다’고 기록하지만, 누가복음은 ‘사단이 들어갔다’고 표현하는 대목이다. 이런 말을 ‘빙의’로 이해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재판 열리는 그 기소 권능을 가룟 유다가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기소하는 그 막강한 권능이 어디로부터 나왔느냐.

그것을 우리가 ‘배신’이라 부른다.

바로 이 12번째 그림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 피터 포르브스가 사단 또는 마귀를 도상에 넣고 있는 유일한 화가이다.

가룟 유다 최후의 만찬
▲12. Rubens, Last Supper (1630-1631), Pinacoteca di Brera, Milan.

가장 마지막으로 루벤스의 <최후의 만찬>을 포함시켰다. 바로 이런 막중한 임무를 띤 가룟 유다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도들의 눈빛과 얼굴에는 의혹으로 얼룩져 있고 확신이 없는데, 오로지 가룟 유다의 얼굴과 눈빛, 그리고 포즈에 확신이 차 있다. 이 게시물 가장 첫 번째 그림의 그 남성이다.

YOUNG JIN LEE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