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회(회장 이광희 교수)가 13일 서울 총신대학교 제2종합관 카펠라 홀에서 '교회와 국가'라는 주제로 2019년 봄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회는 개회예배를 시작으로 이상규 교수(역사신학, 고신대 명예, 백석대 석좌)의 주제발표와 총 10개의 분과별 발표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상규
▲이상규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자강민족주의'와 기독교

'한국기독교와 민족, 민족주의'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한 이상규 교수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의 민족주의는 3가지 유형 혹은 노선으로 지적되어 왔다"며 "첫째는 근대화운동, 곧 선진문명을 받아들임으로써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개화지향의 민족운동, 둘째는 보수 근왕(勤王)운동으로서 신흥자본주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방위하려는 충의사상(忠義思想)에 기초한 민족운동, 그리고 세 번째 유형으로는 동학운동에서 보는 바처럼 봉건적 특권계급에 대한 거부인 동시에 외세의 침투에 저항하는 제3의 노선이 있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비록 이런 유형적 구분이 가능하나 따지고 보면 '근대지향'과 '민족보존'의 두 노선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근대지향에 무심했던 척사위정파가 후자에 속한다면 개화파는 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며 "그런데 양 측면을 통합적으로 인식한 것이 소위 '자강민족주의'(self-construction nationalism)"라고 했다.

그는 특히 "우리의 것을 보수하되 선진문명을 받아들여 국제적인 정치질서의 냉엄한 현실에서 민족의 자강을 추구하는 소위 자강민족주의가 대두되는데 이 필요에 적절하게 응답한 것이 기독교, 기독교회, 그리고 기독교선교사들이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조야에서는 '일본의 승리는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드린 결과'라는 점을 깨닫게 됐다"며 "세계질서, 그리고 극동의 새로운 정세에 눈을 뜨게 되었고, 점증하는 열강들의 야욕을 희미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도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민족적 자강(自强)을 이룰 수 없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그는 "그렇다면 서구와 손잡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시로서는 기독교라는 통로뿐이었고, 결과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런 것이었다"며 "소수의 엘리트 그룹의 기독교 영입론은 그 시대의 요청이었다. 그래서 청일전쟁 이후 기독교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적어도 1895년 이후 1910년대의 성장은 기독교를 통해 민족적 자강을 이루는 의지의 결과였고, 그런 결과로 기독교는 반일적 성격과 함께 충군애국의 종교로 인식되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기독교는 개화와 개혁의 정신적 보루였고,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잠제적인 힘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과 교회는 쉽게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한국에서는 독특한 민족주의를 발전시켰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적 민족주의였다"고 했다.

이어 "바로 이런 특수한 상황이 특히 1910년 이후 한국에서 기독교 수용을 보다 용이하게 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결합되고, 민족주의가 기독교 수용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독특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실은 후일의 한국기독교의 자기표현과 정체성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덧붙였다.

기독교는 '민족'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이 교수는 "한국에서 민족교회론을 처음 제기한 인물은 민경배 교수(백석대 석좌)였다"고 했다. 이 교수는 "그가 말하는 '민족'은 19세기의 전체주의적 민족주의, 즉 독일의 나찌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나 군국주의 일본에서 사용되던 인종적 개념으로서의 민족이 아니었고, 아모스가 비판했던 선민의식도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민 박사에게 있어 민족이란) 언어 역사 생활양식 문화를 공유한 민족공동체를 의미했다. 그가 말하는 '민족교회'란 독일의 '민족교회'(Volkskirche)나 '국가교회'(Staatskirche)도 아니고 신채호의 국혼적 민족주의도 아니었다"며 "그렇다고 해서 민족정신(Volksgeist)을 고양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국가교회 형태나 영국교회(Church of England)와 같은 민족 혹은 인종 혈통주의에 근거한 개념 역시 아니었다. 도리어 그가 말하는 '민족교회'의 개념은 한국민족과 함께한 교회라는 점에서 민족교회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한국교회사 인식에 있어서 민족적 정체성(national identity)과  민족적 일체감(national integrity)을 중시하는 입장"이라고 했다.

개혁신학회
▲학술대회에 참석한 개혁신학회 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개혁신학회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는
비 민족주의적 하나님 의의 추구"

이후 이 교수는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거부'를 조명했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자들이 민족적 과제를 위해 저항하고 투옥되고 순교의 길을 갔는가? 민족적 동기가 신사참배 거부의 진정한 동기였는가? 그렇게 볼 수 없다"면서 "분명한 사실은 민족주의는 보편적 가치일 수 없고, 민족을 이데올로기화 할 때 폭력을 동반한다. 독일의 나치스나 일본의 군군주의가 그러했고, 이들은 민족을 이념화함으로써 타 민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했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 복음은 민족이나 민족주의 한계 안에 안주할 수 없고, 탈 민족적, 탈 인종적이며 보편적 성격을 지닌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유대주의적 경계를 넘어 이방세계로 전파되어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섰고, 복음전파의 보편성이 강조되었다"며 "따라서 민족, 민족주의는 경계해야 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대표적 인물인 故 주기철 목사를 고찰하며 "(주 목사는)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은 복음운동이며, 민족적 과제는 이차적이고도 부차적인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면서 "그는 단순히 도덕적 생활이나 교회를 배경으로 하는 민족운동 혹은 독립운동을 경계했다. 그는 복음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도덕 혹은 윤리운동으로 평가절하 되는 것을 거부했다. 따라서 그의 목회활동과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민족운동 혹은 민족적 동기에서 보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는 일본의 극단적인 민족주의, 곧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에 대한 반대였다"며 "이런 점에서 주기철 목사의 삶의 여정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비(非) 민족주의적인 하나님의 의(義)의 추구였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주기철목사의 삶과 설교, 저항과 순교의 동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다. 비록 그는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적인 시대정신에 무지하거나 무관심 하지 않았으나, 그의 사회활동(social action)을 움직였던 신념은 하나님의 계명에의 충성이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