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승 달꿈예술학교
▲카페에서 ‘알바’하고 있는 류한승 목사.
설교를 할 때는 주제설교와 차례설교를 병행합니다.

차례설교를 하는 이유는 주어진 말씀에 우리 삶을 맞추어 가기 위함입니다. 상황과 순간의 욕심에 따라 말씀을 취사 선택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년 주제 말씀을 붙들고, 연초에는 주제설교를 합니다. 그 시간에는 차례설교로는 담을 수 없는 1년 전체에 담긴 하나님 마음을 세밀하게 바라봅니다.

두 가지 설교의 큰 틀을 병행하면서 1년을 보내므로, 저와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어떤 형식으로도 하나님을 다 품을 수 없음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2019년 주제 말씀은 ‘주님은 나의 방패, 나의 영광’입니다. 송구영신예배부터 시작한 주제설교는 비로소 어제 총정리를 함으로써 마쳤습니다.

오늘 사랑의 편지는 우리에게 어떤 시험이 있는지, 그리고 답안은 무엇인지 정리한 메일을 보내드립니다.

약 3개월에 걸친 설교이므로, 아무리 요약이어도 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하심으로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읽은 것을 내 것으로 소화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영웅 영화에서는 아주 간단한 스토리라인이 있습니다.

-선택된 영웅들이 있다.
-세상이 어지러워진다.
-영웅들이 세상을 바로잡으려 한다.
-영웅들에게 다양한 시험(능력의 사라짐/ 분열/ 거대한 악당)이 다가온다.
-시험을 이기고 세상을 바로잡는다.

우리 믿음 이야기도 이와 비슷합니다.

-선택된 그리스도인이 있다.
-세상이 어지럽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바로잡으려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시험이 닥친다.
-시험에서 승리했다.

2.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은 바로 ‘내가 해결해야 해’ 라는 시험입니다. 그런데 그 시험이 올 때, 우리는 해답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루어 주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영웅 이야기와 우리 이야기가 크게 다른 것은 우리 시험은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능력의 주어짐이 위로부터 주어지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2천년 전 십자가에서 이미 주님이 “다 이루었다”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루어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의 삶은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의 모든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의 예수입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선택에서 우리는 ‘자기’를 죽이고 살게 됩니다.

내가 나를 죽이는 억지가 아니라, 우리는 못 박혔습니다, 십자가에. 그러니까 버려지는 것이지, 내가 억지로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회개가 달라져야 합니다. 팀 켈러의 말처럼, 율법적 회개는 시내산으로 죄를 가져가지만, 진정한 회개는 갈보리로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루려고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갈 때, 십자가에 내가 못 박힘을 알 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저 순종하며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입니다.

3. 고통의 시험이 다가옵니다. 욥이 고백합니다. 시험의 끝에서 ‘나는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 눈으로 하나님을 본다’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눈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자세히 봐야 아름다움을 깨닫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고백처럼 ‘가까이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와 같은 고백이 우리에게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멀리서 보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조금 가까워지면 두려워지고, 너의 상처가 보일까, 나의 상처가 드러날까, 그래서 도망가는 우리 모습이 반복되면, 우리는 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해결책은 그런데, 참 간단했습니다. 바로 욥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고통이 올 때, 귀를 닫아야 합니다. 그리고 눈을 떠야 합니다.

힘들 때마다 사람들은 주변의 말에 의지한 선택을 합니다. 분명히 좋은 사람인데, 세상의 판단 기준에는 해석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편한대로 판단해. 니가 중요해.”

여러분,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닙니까? 네, 하와를 유혹했던 뱀의 말이었습니다. 하와는 그 말을 듣고 실과를 봤더니, 그 실과에서 하나님이 사라졌습니다. 하와는 그 말을 듣고 아담을 봤더니, ‘도와주고 사랑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죄를 나누는 대상으로 보였습니다.

이 주제설교는 청년부 수련회 나눔을 하던 주일에 설교했습니다. 우리 청년부는 올해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오랫동안 봤던 지체들과 새로 들어온 청년들이 절반씩 섞여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자세히 보고, 가까이 보고, 오래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멀리 떨어져 보다가, 아름다움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상대를 보고 실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까워지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뾰족한 가시뿐 아니라, 내게 있는 가시가 상대를 찌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가 미워집니다.

그 해결책은 그래서 다시 그를 볼 때, 나와 그 사이에 ‘예수님’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와 그 사이에 주님이 있을 때 우리는 그의 존귀함이 회복됩니다.

4. 우리에게는 상대적 평가에 대한 시험이 있습니다. 상대적 평가에 대한 시험은 결국 선택의 결과로 이끕니다.

우리는 이 날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서 해답을 찾았습니다. 세상은 상대적으로 평가하며 서로의 존재를 깍아내립니다. 재산, 학력, 가정, 심지어 믿음도 서로 평가합니다. 저절로 상대 존재가 깎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바로 보일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런 우리를 아시고 해답을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나약한 양 한 마리의 가치가 99마리보다 떨어지는 게 아니야.”

충격적인 메시지입니다. 존귀함, 하나의 존귀함을 아는 사람만 99마리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김혜자 선생님의 이야기처럼, 김수미 선생님 한 명의 가치가 자신의 전 재산, 그것도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오랫동안 모은 통장 전체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선교라는 미명 하에, 내가 오늘 해야 할 일, 맡겨진 일, 맡겨진 생명 하나를 버리는 일을 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땅끝의 선교는 바로 오늘 내게 맡겨진 현장에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상대적 평가는 절대적 평가로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5. 우리에게는 소유에 대한 시험이 옵니다. 소유라는 것 자체가 욕심입니다. 따라서 욕심을 잉태한 즉시 우리는 죄를 범하고 죽음으로 치닫게 됩니다.

문제는 이 세상이 자꾸 소유에 대한 시험을 준다는 것입니다. “직업이 중요해. 직업 선택의 기준은 돈이고 환경이야.”

믿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있습니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 10:34)”.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 꿈’이 사라졌습니다. 보다 안정적인 직장. 안정적인 환경을 좇는 세상과 비슷한 선택을 하는 청년 그리스도인들로는, 결코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도전적이어야 합니다. 소유에 당장 궁핍함이 있어도, 꿈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수천년 속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언제나 꿈을 가진 청년들의 도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말씀은 2월 10일, 영화 <극한직업>을 보고 나서 나누었습니다. 역시나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습니다.

“범인 잡으려고 치킨집을 하는겁니까? 아니면 치킨집을 하려고 범인을 잡는 겁니까?”

저는 이 대사가 이 시대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말씀이요, 곧 제게 하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다니는가? 나를 위해 교회를 다니는가?”
“나는 하나님을 위해 목회하는가? 나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가?”

이 질문 앞에 겸허히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유의 시험은 자유함으로 이겨냅니다. 자유함이란, 소유함을 버리고, 오늘 내 삶의 현장이 가난하고 아파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현장을 지키고, 광야에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이 날 나누었던 어린아이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시다니 마음이 놓여요. 말하고 싶은 건 그뿐이에요(마가렛).”

6. 의심이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의심이 오면 우리는 불안해집니다. 불안은 아주 큰 병입니다.

의심이 오는 상태는, 내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갑자기 발생할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기 계획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아주 좁은 세상’ 속에 살려고 결단합니다. 마찬가지로 도전을 막습니다. 도전 없는 승리는 없습니다.

모르는 길을 갈 때 내비게이션이 필요한 것은, 전체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불안 속에 사는 인간이, 내일 일도 모르면서 의심이 생기면 자기 계획으로 산다는 것처럼 미련한 것은 없습니다.

의심이라는 용어에는 ‘분리’라는 뜻도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불안해지면 그는 분리되려 합니다. 떨어지려 합니다. 공동체에서부터 분리되고 관계가 끊어지려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의심은 확신으로 이긴다.” 어떤 확신인가요? 왕의 판단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확신했습니다. 의심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관계가 단절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7. 우리 인생에 대부분의 시험이 바로 이렇듯 수평적 시험입니다. 이 수평적 시험은 이 땅을 하나님의 세상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시험입니다. 그것을 위해, 사탄은 수평적 관계를 통해 도전합니다.

어떤 관계인가요? 가장 사랑하는 지체,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시험입니다. 가족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믿고 있는 친구들입니다.

가족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래서 가족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부모에게 주길 원하셨습니다. 가족의 관계는 아담과 하와가 서로 도와 세상을 다스리듯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리스도인 가족들은, 서로에게 이런 이야기를 더 많이 하지 않습니까?

“교회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집이야.”

“예배는 적당히, 네가 편한 게 중요해.”

“그런 일을 뭐하러 하니, 먼저 돈부터 벌어야지.”

“그 사람은 너랑 안 맞다. 더 좋은 친구를 사뀌어라.”

이 시대에 과연 주기철 목사님의 사모님처럼 “당신은 감옥으로 돌아가시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런 가정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자기로만 뭉친 공동체, 예배도 편안한 예배스타일로 바뀌고, 돈이 소중한 교회가 되고, 좋은 친구만 찾아 떠나는 ‘방랑자 교회’로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 손양원 목사님의 손자이신 손성열 선교사님의 사모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수화 찬양 사역을 하셨던 사모님이 유방암에 걸리셨음에도, 수술을 포기하시며 하셨던 이야기입니다.

“여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은 수화찬양 하나야. 내가 수술 받으면 농아인들이 찬양을 할 수 없어.”

결국 말기암이 되어 떠나시기 직전까지 수화찬양을 하셨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평적인 시험은 매우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주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험을 당하면, 수평적인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지 않는 무서운 시험입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수직적인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능력은 오직 수직적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절대로 놓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배는 목숨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마음이 조금 힘들고 심란하다면, 누군가가 옆에서 혼란을 준다면, 그러면 그 날이야말로 그 힘든 마음 갖고 예배하십시오. 바로 그 날 능력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8. 모든 일 앞에서 기억해야 할 시험의 해답이 있습니다. 일과 사역, 사명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시험 답안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화평의 땅으로, 하나님 나라로 바꾸어야 합니다. 땅끝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곳에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새롭게 북한 어린이센터를 세우는 컴패션과 협력하는 사역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그것도 주님 명령이니, 순종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소중한 주님의 명령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소명이 사명보다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세례로 충만해서 사역하시기 직전,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그때 주어진 사탄의 시험입니다. “주님 돌을 떡으로 만들어 드십시오. 40일 기도 끝나지 않았습니까?”

너무나 달콤한 유혹 아닙니까? 합리적인 질문 아닙니까? 그러나 그때 주님의 대답입니다.

“무슨 소리야. 돌은 원래 돌이야. 떡은 원래 떡이야. 중요한 것은 말씀이야”. 이 세상의 질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소명이 사명보다 우선입니다.

소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러분을 광야로 불러주신 그 Caller를 보는 것, 믿는 것입니다. 돌을 돌대로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것입니다. 떡을 보며 천하다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줄 알아야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9. 사랑하는 여러분. 7가지 시험 앞에서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미 송구영신예배에서 하나님은 시편 3장 3-6절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가 나의 방패랍니다. 그런데 나의 영광이랍니다. 이미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3절의 ‘방패’는 심지어 영어 성경에는 ‘you are a shield around me’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시인의 주변에 천만인이 둘러싸도 두렵지 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의 승리하신 방패가! 이미 내 주변에 around, 완벽하게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딜 가든 예수와 함께 있으므로 승리했던 것입니다.

카페 쿰 골고다 십자가
▲카페 쿰의 ‘빛이 만든 십자가, 벽에 새겨진 십자가’.
10. 쿰카페의 하얀 벽에는 아무것도 비추이지 않습니다. 한 청년이 벽이 허전하다며 선물해 준 제 얼굴이 달린 그림 하나가 덩그러니 있을 뿐입니다. 새하얀 벽에, 못난 제 얼굴이 덩그러니 있는 그 모습은 때론 처량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오가 되면 그늘진 하얀 벽에 오직 카페 쿰에서만 볼 수 있는 위대한 작품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만들지 않은, 누구도 만들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은, 십자가입니다. 그것도 마치 골고다 같은 십자가가 정오 한복판에 드러나게 됩니다.

골고다의 언덕보다 더 거친 언덕 위에, 외로운 주님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빛이 만든 십자가’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두번째 가제는 ‘벽에 새겨진 십자가’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려지는 것일까 살펴보니, 그 벽의 맞은 편에 해답이 있었습니다. 맞은편에는 카페 온수기가 있습니다. 그 위에는 목각 십자가가 조그맣게 놓여져 있습니다.

그 밑에는 각종 카페 도구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습니다. 그리고 그곳 유리문을 통해 빛이 가장 뜨겁게 내리쬐면, 이 모든 것들이 조합되어 하얀 벽에 완벽한 골고다 십자가가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의도 하나 없이 오직 빛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모형은 집사님께서 가져오신 것을 집사님께서 어디다 놓을까 고민하다 놓을 곳이 없어 온수기 위에 올려둔 것입니다. 온수기는 카페에서 물내리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카페가 매우 비좁아, 여러가지 도구들을 온수기 밑에 놓아두었을 뿐입니다.

유리 창문은 매우 뜨거워서 블라인드를 하기는 했지만 외부 손님들이 오가며 안을 보실 수 있도록 대부분 올려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 형태들로만 보면 전혀 감동적이지도 않고, 심란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정오의 시간, 블라인드를 가리지 않고 그 빛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빛은 유리 창문을 만나 강렬하게 투사하여 십자가 모형과 온수기, 그리고 너저분한 잡다한 도구들까지도 한데 어우려지게 하여, 하얀 벽 위에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의미없는 부르심은 없습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내게 왜 이런 고통이 생겼을까? 나의 일은 온수기처럼 물만 내리는 의미 없는 일이 아닐까? 나는 십자가의 사람인데 왜 이 온수기통위에 있는 것처럼 버림받은것 같은가? 언제 나는 십자가의 빛이 발하는 빛과 소금의 사람이 되는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이 허락하신 광야라면, 그 곳에 서 있을 때 여러분의 모든 어지러운 상황마저 하나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이 마치 텅 빈 곳처럼 허망해보이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른다 해도 빛 되신 주님과 함께한다면, 여러분을 통해 이 땅에 완벽한 빛이 만든 십자가가 드리워질 것이요, 그것을 통해 지친 누군가의 심령들이 회복될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빼앗아 가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더해주시고 곱해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샬롬. 부디 여러분의 삶에 빛이 만든 십자가가 드리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