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윤치호를 보낸 후 남궁억은 서재로 들어갔다. 그새 날이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등불을 켤 생각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창에 백발이 성성한 그의 모습이 비쳤다. 그림자와 같이 흐릿한 영상이었다.

그는 유리창에 어린 자신의 눈동자를 찾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자신의 정체가 흐릿하여 그것을 찾아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알 수 없지, 알 턱이 없지.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가 있을 리가 없지. 있다고 해도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야.”

얼마 후에 그는 또 중얼거렸다.

“그럼 나는 무엇인가? 내 뜻대로 무엇인가 해보려 해도 악당 같은 놈들에게 방해받아서 제대로 해볼 수도 없는 판인데 나의 정체를 어떻게 밝힐 수가 있겠는가?”

그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어두운 창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창밖 어디선가 울어대는 늦가을의 풀벌레 소리만이 그 불면의 밤을 지켜 주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그는 일어나 등불을 켜고 서가에서 성경책을 뽑아들었다. 오래 전 외국인 교사에게 선물받은 것이었다.

누렇게 변색된 페이지를 그는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한문이 주로 쓰이던 그 당시에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한글 보급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느 페이지에서 손을 멈춘 남궁억은 푸른 밑줄이 쳐진 구절을 천천히 읽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영어학교 시절에 공부하는 틈틈이 읽다가 마음에 들어 밑줄을 쳤던 것이었다.

그는 자기도 앞으로 밀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 알의 밀알처럼 자기 한 몸을 희생해서라도 쓰러져 가는 조국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었다.

사실 남궁억은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다. 자기만의 이익을 탐하지 않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이 민족의 앞날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만을 실행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총독부의 횡포 앞에서 힘이 모자라 당하기만 해야 하는 것이 애닯고 슬퍼 사나이 홀로 속마음으로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또 파란 줄이 쳐져 있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예전에 그 구절을 읽던 당시의 어떤 추억이 떠올랐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눈은 추억에 젖은 게 아니라 어떤 굳은 결심을 나타내듯 생생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까 유리창에 비쳤던 흐릿한 눈동자가 아니었다. 청년처럼 맑은 생기를 띤 눈이었다.

그 당시 가슴 속에 피가 끓는 청년이던 그는 좀 뜬금 없는 상상도 했었다. 모세가 유태민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이야기가 담긴 출애굽기를 읽은 그는 어떤 학우와 열기 띤 토론을 벌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구약성경은 유태민족의 역사책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모세는 유태민족의 독립운동 지도자고 말야.”

남궁억의 말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 학우는 차분히 대꾸했다.

“그건 네가 쉽게 생각해서 그래. 성경은 신의 말씀을 기록한 심오한 경전이야.”

“난 쉽게 이해되던데 그래.”

“읽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의미가 변하는 게 바로 신비로운 성경이야.”

“물론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이나 영감을 받은 사람이 기록을 했겠지. 아무튼 내 눈엔 그게 환히 보여. 유태민족의 현실적인 삶이 말야.”

그것까지는 좋았다. 얼마 후 신약성경을 읽은 남궁억은 그 학우에게 또 주장했다.

“예수님은 영혼의 구세주이기도 하겠지만,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가련한 민족을 구해내려는 독립운동의 지휘자이자 투사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어.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자기 나라와 민족이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서 억압받고 있는 시절에 예수님께서 그냥 보고만 있었을까? 결코 아닐 거야. 정의로운 투사로 활약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읽으니까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던걸.”

“그건 네가 너무 우리 민족에 대해 걱정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 아무튼 못 말리는 친구여.”

그 학우는 기가 찬지 헛웃음을 웃고는 어디론가 나가 버렸다.

어쨌거나 모세나 예수의 삶은 남궁억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는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하리라고 마음 깊이 새겼다.

목숨이 자꾸만 스러져 가는 한민족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한 목숨을 바치리라는 결심이었다.

남궁억은 푸릇푸릇하던 청춘 시절을 회상하면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아마도 그 무렵의 유치한 발상에 대한 미소였을 터였다.

하지만 유태민족과 한민족의 비슷한 상황 때문인지, 그는 지금 그 유치한 상상을 굳이 부인하는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물론 그걸 긍정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 후로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때때로 성경을 펼쳐 보곤 했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재음미하면서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예수는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위해 사랑을 펼친 영혼이었다. 남궁억은 예수가 실천한 박애, 평등, 자기 희생의 정신이 좋았다. 그 자신도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진리, 정의, 사랑을 위해 피흘려 투쟁하다가 순교한 예수는 한민족에게도 희망이자 참다운 삶을 비춰 주는 거울이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 어느덧 새벽이 되었다.

남궁억은 성경을 책상 위에 놓고 방바닥에 꿇어앉았다.

“인간은… 아니, 저는 제법 강한 척하지만 사실은 작은 개미보다도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은 위대한 능력을 지녔기도 하지만 사소한 벽에 막혀 무너지기도 하는 가련한 존재임을 느낍니다.

하느님이시여, 나약한 저를 도우사 앞길을 밝혀 주시고 이 나라의 살 길을 열어 주소서.”

남궁억은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기도를 올렸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에 들어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 이튿날 윤치호가 다시 찾아왔다.
남궁억은 윤치호를 따라 종로 도렴동에 자리잡은 종교교회로 나가서 입교세례를 받았다.

종교교회라는 이름은 종침교(琮琛橋), 일명 ‘종다리’ 옆에 세워져 붙여진 것이었다. 원래는 캠벨 선교사에 의해 배화학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모임이 발전하여 독립하게 되었는데, 윤치호는 그곳의 중심 인물로서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남궁억과 윤치호가 나오는 종교교회는 민족주의적인 신앙과 교육의 중심지로서, 진보적인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어 민족을 구하기 위한 신앙운동과 공부를 했다.

남궁억은 신앙 속에서 차츰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그는 한층 더 열심히 우리 민족의 미래를 이끌고 나갈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데 온 심혈을 쏟았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