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영익기념강좌
▲‘3.1운동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23회 영익기념강좌 현장. (왼쪽부터)오일환 교수, 오영섭 교수, 박명수 교수, 홍선표 교수, 장금현 교수. ⓒ김신의 기자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27일 서울신학대학교 우석기념관 강당에서 ‘3.1운동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제23회 영익기념강좌를 개최했다.

첫 강좌를 맡은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는 “현재까지 신한청년당에 대한 논문은 있었지만, 기독교적인 성격과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대해 본격적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며 ‘신한청년당의 형성 과정과 기독교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박 교수는 “기독교를 통해 미국의 민주주의가 소개된 중국은 진나라부터 시작된 황제 시대가 1911년 산해혁명으로 끝나고 새로운 공화국의 시대를 맞았다. 비슷한 시기,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에서는 1915년, 황제 제도 복원을 원하는 복벽주의 독립운동단체 신한혁명당이 출현했고, 1917년에는 러시아의 사회주의적 혁명에 영향을 받은 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힘으로 제압하려는 이미지가 강했기에 호응이 없었고, 독립운동에 한계를 맞이할 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었다”고 했다.

특히 박 교수는 “상해를 중심으로 국제질서의 변화와 한국의 독립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당시 일본이 해외 유학을 금지하자 한국인들이 상해에 밀려들기 시작했고, 일본은 상해가 독립운동의 온상이 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의 정보당국 보고에 의하면 조선과 상해, 미국을 연결하는 중심에는 언더우드, 사무엘 헤드 마펫, 조지 필드 피치 등 기독교 선교사들이 있었다”고 했다.

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가 ‘신한청년당의 형성과정과 기독교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김신의 기자
또 박 교수는 한국YMCA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상해YMCA’와 성장하고 있는 ‘상해한인교회’ 및 중국의 대표적 기독교 대학인 ‘금릉대학’과 ‘기독교학생공동체’에 대해 설명하며 “당시 상해의 한인사회는 동제사를 중심으로 했던 공동체에서 점차 기독교 중심의 공동체로 변화되고 있었다”며 “기독교 신앙을 갖고 독립운동의 기회를 얻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고 했다.

이어 ‘신한청년당의 형성 과정’을 살피며 “일본 유학 중 YMCA에 출석한 장덕수와 여운형은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동우등과 신한청년당을 기획했는데, 당시 인물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며 “구성원 모두가 20대 30대 기독교 청년이었고, 민족자결주의 등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탄생한 점에서 신한청년단은 이전의 단체들과는 구별된다”고 했다.

또 박 교수는 “윌슨에게 보낸 『신한청년당 독립청원서』는 신한청년당의 성격과 창립 당시의 이념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며 “그런데 한국사 학자들은 신한청년당이 이 청원서를 소개할 때 기독교적 요소를 무시하거나 간략하게 처리하고, 왜곡하는 사례가 많았다. 또 현재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중요한 전거로 삼은 『신한청년』은 신한청년당에 가입한 적 없는 박은식이 쓴 것으로 창립 이념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신한청년당 독립청원서』에 대해 “청원서는 1차 세계대전을 영적 전쟁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세력의 승리에 대한 감사로 시작하는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 인해 새 시대가 열렸고, 일본은 새 국제질서에 맞지 않는 비민주국가라고 말한다. 또 동제사와의 관계를 보여주며 신규식의 영향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동제사와 달리 한국의 미래를 위해 기독교를 중심이 되는 종교로 보고 있다. 미국을 새로운 국제질서의 중심으로 보고 있다”며 “결국 신한청년당은 한국에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한 논찬에서 오일환 교수는 “대한인국민회, 신한청년당 두 단체를 빼고 역사를 논할 수 없는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연구는 부단히 의미가 있다. 그런데 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기독교 역할이 미약하게 드러나고 조명이 되지 않는다. 위대한 역사를 중시하지 않았던 것과, 기독교인의 역할을 약화시키려 하는 움직임을 반성해야 한다”며 “시기별 연구, 사조와 가치, 오늘의 의미도 앞으로 점검하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홍선표 교수
▲홍선표 교수(나라역사연구소 소장,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가 3.1운동에 대한 미국의 언론 보도를 살폈다. ⓒ김신의 기자
두 번째 강좌를 맡은 홍선표 교수(나라역사연구소 소장,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는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올해 초부터 미국 언론에 실린 3.1운동 보도 기사 수집 작업을 착수했고, 전시도 준비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심층적 연구가 본격화되길 기대한다”며 3.1운동에 대한 미국의 언론 보도를 살폈다.

홍 교수는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3.1운동에 대한 보도가 해외에 나가지 않도록 엄격한 보도 통제를 했지만, 3월 6일 해금했다. 실제로 3월 3일 일본 내 언론은 비교적 신속하게 3.1운동의 발발 상황을 보도했다”고 했다.

홍 교수는 “중국 내 언론도 한국 내 3.1운동 상황을 심도 있게 보도하였는데, 3월 3일 『The North China Herald』 의 보도를 시작으로 『민국일보』, 『국민공보』, 『시보』, 『시사신보』, 『익세보』 등 3.1운동 소식을 보도했다”며 “미국에서는 정동감리교회 목사인 현순이 3월 9일 새벽 미주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지방총회(호놀룰루)에 긴급 전보하고, 안창호 중앙총회장이 전달받아 3월 9일 북미 및 멕시코 각 지방 한인 사회에 소식을 전하면서 3월 10일부터 미국 『San Francisco Examiner』, 『The Los Angeles Times』 등에서 언론 보도가 시작됐다. 동부의 『뉴욕타임스』는 3월 13일 3.1운동 소식을 전파하며 다소 시차를 보였다”고 했다.

이어 “일본의 자국 언론은 일본인 측의 인명 시설 피해상황에 초점을 두는 반면, 영자 신문은 한국인의 독립운동과 피해 상황에 집중했다”며 “토막 기사의 영자 신문도 있지만, 다수의 신문이 3.1운동을 전면에 싣는 등 구체적으로 다루고 헤드라인 급으로 보도를 했다. 이 같은 미국 언론의 집중 보도는 3.1운동을 국제적인 독립운동으로 확대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문제를 국제적인 화제거리로 만들어주었다”고 분석했다.

제23회 영익기념강좌
▲‘3.1운동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23회 영익기념강좌 현장. ⓒ김신의 기자
또 “미국 언론이 한국 독립문제에 관심을 갖고 보도하게 된 배경에, 한국에서 주재원으로 활동한 신문 통신원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재한 선교사들의 역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며 “재한 선교사들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솔직하고 냉정하게 한국인의 입장을 대변해주었고, 재한 선교사들이 보낸 각종 보고서와 편지는 3.1운동의 실상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증거물이 되었다”고 했다.

끝으로 오영섭 교수(연세대 이승만 연구원 연구교수)가 “미국 신문에 실린 3.1운동 기사는 사실 위주로 정리해 주신 것에는 이견이 없다”며 “다만 미국 사회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맥클래치 소개 영역본을 누가 번역했는지, 선교사와 신문사 등 어떻게 정보를 미국에 전달했는지” 등에 대한 과제를 제시했다.

한편 앞선 예배 시간엔 홍권희 목사(조은교회)가 기도하고, 이성준 목사(수정교회)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3~14)”을 본문으로 설교했다.

영익 기념 강좌는 연구소의 설립 기금을 마련한 故 김영익 집사(장충단교회)를 기리기 위해 지난 1997년부터 매년 봄에 개최되고 있으며, 한국 교회 및 복음주의운동의 최근 이슈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왔다.

제23회 영익기념강좌
▲제23회 영익기념강좌 기념 사진. ⓒ김신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