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남궁억 선생의 동상. ⓒKIATS 제공
바람이 한결 쌀쌀해진 만큼 일본의 무단통치도 점점 더 살벌해져 갔다.

총독부는 헌병 또는 경찰에 즉결처분권을 주는 통치로 식민지 백성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조선 사람은 경찰서나 헌병대를 죽음이 보이는 무서운 지옥으로 여기게 되었다. ‘순사 온다’ 하는 소리만 들어도 울던 어린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칠 정도였다. 조선의 모든 곳이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다.

한일합방 후 총독부 당국은 일정 시간을 배정해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더니 점차 한글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만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평상시에도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여, 학생들에게 다달이 일정량의 표를 나누어 주곤 조선어를 사용할 때마다 그 표를 서로 빼앗아 먹도록 하는 등 온갖 치졸한 수단을 다 썼다.

일본은 조선 역사마저도 말살시키고자 하였다. 조선인은 원래부터 분열적이고 의타적인 민족이며, 나약하여 외국의 침략을 많이 받은 열등한 민족이라고 비하했다.

또한 옛날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으므로 지금도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며 그래야 행복하다는 식의 왜곡된 역사의식을 심어 주었다.

한 나라의 임금이 거처하던 창경궁은 일본에 의하여 크게 훼손되었다. 그들은 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 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했다.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꾸었으며, 얼마 후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궁 안에 일본 국화인 벚꽃을 수천 그루나 심어놓고 밤 벚꽃놀이를 흥청망청 즐기게 했다.

이를테면 그건 조선의 얼과 넋을 빼어내 동물원의 창살 속에 집어 던지고 비웃으며 침을 뱉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어느 날, 가을빛 저물어 가는 토요일 오후에 한 방문객이 찾아왔다. 친구인 윤치호였다.

“어서 오시게.”

“잘 지내시는가?”

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그는 예전에 남궁억과 함께 독립협회에서 활동했으며 독립신문 사장으로 일하기도 한 인물로서, 두 사람은 서로 사돈 간이기도 했다. 남궁억의 둘째 딸 자경과 윤치호의 둘째 아들 광선을 혼인시켰던 것이다.

여윈 체구에 코가 뾰족하고 동그란 알안경을 낀 윤치호는 좀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 그는 그 즈음 기독교청년회의 부회장직을 맡아서 청소년 계몽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재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부인 양씨가 차를 가져다 주고 갔다. 찻잔을 들어 천찬히 음미하듯 마신 윤치호가 말했다.

“한서(남궁억의 아호), 얼굴이 많이 여위었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가?”

“이 난세에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학교 일이 힘들지? 혼자 너무 많은 짐을 지려고 하지 마시게나. 그러다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렇잖아도 예전에 일본 경찰에게 받은 고문으로 인해 온전한 몸이 아닌데 말야.”

남궁억은 1896년 동지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설립해 수석총무로 일했고, 협회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영문판 편집에 종사했었다. 그러다가 독립협회에 대한 수구파의 모략으로 인해 경찰에 체포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다.

또한 1898년에는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사장을 맡았다. 황성신문은 정부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일본의 침략야욕을 비판했으며, 국민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했다.

이러한 황성신문의 논조는 정부의 미움을 받게 되어 남궁억은 여러 차례 경무청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었다.

또한 1902년엔 러시아와 일본이 밀약으로 대한제국을 나눠 먹으려 교섭하고 있다는 기사를 황성신문에 게재하여 경무청에 수감당했다. 그것은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필화사건이었다.
남궁억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좌옹(윤치호의 아호), 요즘은 내가 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낼 때는 그나마 견딜 만하지만, 밤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마치 강철로 된 쇠상자 속에 갇힌 느낌이거든.

이 세상이 다 감옥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강박관념을 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가슴이 답답해져. 아마 일본의 탄압이 너무 가혹하다 보니 나의 잠재의식 속에 스며들어 둥지를 틀어 버린 모양이라.”

그는 말끝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며 상체를 좌우로 흔들던 윤치호가 말했다.

“여보게, 교회에 한 번 나와 보면 어떻겠나?”

“교회라…?”

“이런 엄혹한 시절을 우리 사람의 뜻과 힘만으로 헤쳐 나가긴 어렵지 않은가.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빌려 보세나.”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남궁억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 기독교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오래 전 영어학교 학생 시절에 외국인 선교사가 준 성경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서구의 신학문과 문물은 대부분 선교사들을 통해 이 땅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식인이나 선각자들 중엔 기독교와 관계된 경우가 많았다.

배화학당이 세워지게 된 데는 윤치호의 역할도 있었다. 그는 예전에 친분을 쌓은 미국 에모리 대학의 캔들러 학장에게 이 땅에 기독교학교가 필요하다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 제안을 검토한 남감리교에서 선교사를 파견하여 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었다.

그 인연으로 남궁억을 교사로 초빙하게 된 셈이기도 했다. 남궁억은 마음이 심란할 때는 홀로 배화학당 옆에 붙은 예배당으로 들어가서, 십자가 위에 못박혀 피 흘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며 묵상에 잠기기도 했던 것이다.

“좀 생각해 보겠네. 아무튼 여러 모로 고마우이.”

“무슨 그런 말을. 그런데 염이는 잘 지낸다던가?”

“제 나름대로 노력하며 사는가 보더군.”

염(炎)은 한서 남궁억의 아들인데, 미국에 건너가서 공부하는 중이었다.

한서는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 어둠을 밝히라’는 뜻으로 아들의 이름을 불꽃 염 자로 지었던 것이었다.

“그럼 건강에 유의하시게. 조만간 내 또 옴세.”

“잘 가시게.”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