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안교회 장시환
▲새안교회 장시환 목사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13: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3: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3: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3: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사순절 기간동안 [요13장]부터 '십자가의 길'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가' '그가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깊은 의미가 무엇인가' 이를 하나 하나 보는 것입니다. 이 안에는 주님께서 죽음을 앞둔 마지막 시간에 주신 소중한 가르침들이 압축적으로 증거되어 있기에, 우리는 이 말씀들을 거듭해서 읽으며 그 의미를 주야로 묵상해야합니다.

본격적인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요13장]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것이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인데, '끝까지'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죽으실때까지' '이 땅에서의 숨이 다하실 때까지' 입니다. 그 '끝까지 보이신 사랑'이 무엇인지를 요한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13:3 저녁 먹는 중..

여기 '저녁 먹는 중' 이란 말이 바로 최후의 만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만찬의 자리는 어떠했는가. 벌써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유다와 주님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배반, 이것이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자 영적인 십자가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땠을까요. 같은 장면 [눅22장]을 보면 이 최후의 만찬의 자리라는 것은 매우 경건하면서도 깊은 감동이 있는 자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포도주 잔과 떡을 나누시면서 이것은 내 피요 내 살이라. 자신을 비우시고 자기 몸을 찢어 나누어 주시는 희생의 의미, 십자가의 깊은 뜻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다른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눅22: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이는 매우 슬픈 이야기이고 또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늘 한결같이 제자들을 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 사이에는 누가 크냐 라는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최후의 만찬의 자리, 주님께서 참혹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유명한 장면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은 비포장 도로였기 때문에 정돈도 안되어 있고 진흙탕 황톳길 먼지가 흩날리는 그런 길이 많았습니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겨우 좋은 신을 신었다 해도 몇개의 줄이 달린 샌들같은 것을 신었습니다. 그것을 신고 온종일 다니면 발이 매우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입구에 보면 물항아리가 있고 수건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령 그 집에 손님이 들어가면 그 집 노예가 나와서 더러운 발을 씻어주고 닦아주는 것이 예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정말 미천한 자들이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하십니다.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하나 하나 씻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13절을 보면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은 마땅히 섬김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로부터 마땅히 섬김을 받을 자다. 그러나 그런 자로서 내가 너희를 섬기노라"

이것으로 주님은 무엇을 보이시고 가르치신 것인가. 진정한 권위란 무엇인가.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얘기해주시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주인은 주인이고 종은 종입니다. 주인은 늘 종을 부리고 명령하는 자이고 종은 그 명령을 받아서 그대로 따르는 자입니다. 늘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늘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즉, 섬기는 자가 주인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종이 하는 일인데 어떻게 그런 자가 주인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어떤 것인가. 진정한 권위는 어디서 얻어지게 되는가. 그것은 진정으로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 낮아질 수 있는 자가 높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열어주시고 이뤄가시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사랑의 세계, 사랑의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먼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먼저 섬기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를 기를때 그 자녀들을 호령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종이 되어서 섬기는 자리에서부터 부모의 삶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지금 제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들 발을 하나 하나 씻으십니다.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님이 보이신 행위은 매우 낯설고 충격적인 것입니다. 왜? 세상은 섬기는 것은 하찮은 노예, 종이나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 통념에 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지금 제자들을 씻는 것입니다. 씻는 것은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로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지 않으면 주님과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주님께 씻음을 받아야합니다. 무엇을 씻는다는 것일까요. 죄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보이신 이 행위속에는, '우리가 어떻게 죄를 씻을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죄로부터 깨끗해질 것인가' 에 대한 깊은 가르침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것을 가르치신 그것이 '끝까지 사랑하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진짜 사랑일까요. 그를 죄로부터 깨끗하게 해주는 것,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 인생의 고통은 다 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습니다. 심판이 옵니다. 그것을 면하게 해주는 일. 그로부터 자유케 해주는 일. 이것이 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챙겨주고 육적으로 편하게 해주고 이런 것 또한 소중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그가 죄로부터 깨끗하게 해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시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하나요.

13: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3: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신앙의 삶의 모든 것이 이 안에 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가지 온몸을 씻는 목욕이 있고 발만 씻는 것이 있습니다. 로마서의 내용이 이미 여기 다 있습니다. 사도 이전에 이미 주님이 다 얘기하신 것입니다. 칭의(稱義, Justification)와 성화(聖化, Sanctification). 주님께서 우리 죄의 모든 것을 지시고 죽으신 은혜를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일때 우리 모든 죄가 사함받습니다. 이 은혜를 체험한 자를 '거듭났다' '중생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 깨끗함을 받은 자라 해도 매일 또 죄를 짓고 우리가 살아갑니다. 그 습관적인 죄성 또한 우리가 날마다 주의 말씀앞에 회개하고 씻음받아야합니다. 고침을 받아야합니다. 목욕을 어제 했어도 오늘 밖에 돌아다녔으면 집에 들어와 발을 씻어야합니다. 발은 매일 씻어야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도 늘 주의 말씀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은혜를 받아 말씀대로 살고자 해야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과 상관 있어집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혹은 그리스도의 제자라 일컬음 받을 수 있습니다.

13: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이 씻음의 의미를 아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이후 한 명도 남김없이 도망가고 부인하고 배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합니다. 주의깊게 듣고 잘 알아야합니다. 내가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이 제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주님을 또 아프게 해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행하신 것.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 그것은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스스로 낮아지시고 비우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린 십자가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또 죽음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뭐가 죽는 것인가. 주님은 우리의 온갖 죄악을 담당하고 죽으셨습니다. 그것을 걺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기간 우리 안의 죄성들 깊이 돌아보고 그것들이 다 죽어지는 기간으로 삼아야할 것입니다.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욕구는 성령을 거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욕구는 자꾸 죄를 짓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안에 이런 것이 가득합니다. 나쁜 것 보려 하고, 미워하려고 하고, 이기적으로 살려고 하는, 그런 죄에 찌들은 나. 중독된 나. 병든 나. 기회만 있으면 죄를 짓기에 발이 빠릅니다. 이것이 은혜를 못받게 합니다. 선한 일을 못하게 합니다. 거스른다는 말입니다. 대적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받으신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소중한 의미는 이 죄악의 모든 것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몸소 보이시고 행하신 것을 따라서. 섬기려 하고 비우려 하고 낮아지려고 할때. 십자가는 철저한 자기부정의 상징입니다. 나를 깡그리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교만이 절대 싹틀 수 없습니다. 죄가 자리잡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교만합니다. 훨씬 이기적입니다. 오죽하면 바울이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했을까요. 본질적으로 뼛속깊이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들을 위해서, 지금 주님은 제자들에게 또 우리에게 죄로 인해 멸망받지 아니하고 살 수 있는 새 길을 열어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그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비우시고 먼저 낮추심으로, 너희도 이렇게 살으라는 것입니다.

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 사랑이 무엇인가. [눅22장]에서 누가는 너무도 정확하게 제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모습들을 다 기록해놓았습니다.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도 그들안에 내가 옳다 내가 높다 하는 다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늘 받았던 제자들인데...

그러나 이것이 제자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우리안에 여전히 있는 이 교만의 모습, 다툼의 모습, 이 말도 안되는 죄성은 어떻게 청산될 수 있을까요. 요한사도는 오직 한 가지의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주께서 보여주신 것 같이,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낮아지시고 모든 이의 섬김을 받을 분이신데도 끝까지 섬기신 것처럼, 우리도 이 본을 따라서 살아갑시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 날마다 씻음받고 날마다 정결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는 우리들 다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