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가을바람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교정 여기저기 쓸쓸히 굴러다니고 있었다.

남궁억은 처음엔 영어 교사로 배화학당에 초빙되었지만 차츰 조선 역사, 한글 붓글씨, 가정교육 등을 가르쳤다. 그만큼 학교 측에서 그의 인품과 교육 능력을 인정한다는 증거였으며 또한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얘기였다.

총독부는 식민교육을 강화시키고 있었으나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 대해서는 민족학교에 비해 아직 탄압이 심하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도 드러내 놓고 한글과 우리 역사를 가르칠 형편은 아니었다. 만일 들키는 날엔 악랄한 총독부 경찰에 잡혀 갈 각오를 해야 했다.

남궁억은 그런 감시를 피해 우리 역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고, 한글 붓글씨를 통해서는 정숙한 마음가짐과 민족의 얼을 가슴속 깊이 새기도록 했다.

얼마 후부터는 배화학당에서 퇴근한 뒤엔 상동에 있는 ‘청년야학원’에 나가 가난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어려운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한 글자라도 배우려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야학원 원장을 맡아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남궁억의 집념 어린 노력에 힘입어 배화학당은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는 학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단순한 지식의 암기가 아닌, 곰곰이 되씹을수록 살아가는 데 살이 되고 피가 되는 말씀이 수업시간을 채웠다.

그리고 일방적인 주입식이 아니라 중요한 문제는 서로 토론하여 해결책을 찾는 방식이라 재미있었다. 그의 정연한 논리와 열정적인 음성은 학생들의 주목을 끌어모으고 젊은 피를 끓게 했다.

“우리가 잊고 지내기 쉽지만, 말과 글에는 나라와 민족의 생활과 영혼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만약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버지’라고 말하면서 글은 ‘父’ 또는 ‘father’라고 써야 할 것입니다. ‘방글방글’ 웃는 모습이나 ‘넘실넘실’ 흐르는 강물은 표현할 수도 없을 테고요. 아주 불편하고 답답하겠죠?

그래서 오래전 세종 임금과 집현전 학자들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한글을 만들어 널리 폈던 것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피워낸 꽃과 열매가 더 아름답고 달콤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맙시다.”

이처럼 나라 잃은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사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희망을 심어 주려 했다. 그래도 우울할 때는 책을 덮곤 학생들과 함께 하모니카를 불고 노래를 부르며 늘 웃는 모습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우리를 낳고 기른 한반도 강산아
네 길이 복 받고 무궁하여라
삼각산의 암석이 다 부서지고
양양한 한강물이 다 마르도록
우리 우리 조선의 아름다움을
해와 달과 한가지로 짝하리로다

이 노래는 남궁억 자신이 직접 가사를 짓고 곡을 붙인 것이었다. 잃어버린 조선 강토에 대한 사랑과 애국심을 가슴에 담으며 합창을 하다 보면 감수성이 예민한 여학생들은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면 남궁억은 자상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여러분의 눈물이 슬픔보다는 희망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면 좋겠군요. 슬픔은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 스스로 희망을 만들면서 저 목적지를 향해 걸어 나갑시다!”

“네!”

이 노래는 모두 4절로 되어 있는데, 1절에서 한반도의 모습을 호랑이가 대륙을 향해 앞발을 쳐들고 포효하는 웅혼한 모습으로 그렸다.

조선 팔도강산의 학생들은 이 ‘조선지리가’를 부르며 ‘맹호웅비도’를 그리곤 했으므로 총독부는 마침내 노래를 금지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한반도의 모습을 토끼와 닮았다고 가르치게 했다. 조선인을 허약하고 순종하는 민족으로 깎아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런 어느 날 남궁억은 문득 기발한 생각을 하나 떠올렸다.

“여러분, 주목해 보세요.”

그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심어 주기 위하여 무궁화로 한반도 13도의 모습을 자수로 놓도록 지도했다. 태백산맥을 굵은 나무줄기로 삼아 거기에서 여러 곳으로 뻗어나간 가지에 무궁화를 수놓는 것이었다.

여학생들은 자신의 손끝에서 한 땀 한 땀 아름답게 피어나는 무궁화 자수를 보면서 여성다운 섬세한 심성을 가꾸는 동시에 가슴 깊이 애국심을 새겼다.

“얼이 살아 있으면 희망도 있습니다. 빼앗긴 땅이지만 우리가 한 송이 한 송이 수놓아 금수강산을 채운다면 언젠가는 꼭 되찾게 될 것입니다.”

학생들은 삼천리 금수강산에 무궁화가 송이송이 활짝 피어난 모습을 정성 들여 수놓았다. 무궁화 자수는 점점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각 가정의 장식품으로 활용되었고 애국정신을 기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무궁화를 수놓은 손수건과 삼동주 태극기를 비밀리에 해외의 애국지사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총독부는 태극기와 함께 무궁화를 우리 민족과 멀리 떼어놓기 위한 술책을 꾸몄다. 그들은 무궁화를 볼품없는 지저분한 꽃이라고 비하시켰으며, 어린 학생들에게 무궁화를 보면 눈병이 난다느니 심지어 눈이 먼다고까지 거짓말로 세뇌를 했다.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아무 곳에도 무궁화를 심지 못하게 하고, 이미 자라고 있는 무궁화를 캐어 오는 학생들에겐 상을 주었다. 그리고 무궁화를 캐어낸 자리에 벚꽃을 심도록 하여 우리 강산을 영원히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정책을 폈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