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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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치가 전 세계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충치는 전 세계적으로 빈번하게 발생하는 질환으로 통증과 삶의 질 저하를 야기하는 질병이다.

충치는 주로 설탕 섭취가 많은 나라에서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과거에는 선진국에서 많이 나타났으나, 최근에는 개발도상국에서 더 발병률이 높은 경향을 보인다. 충치가 미치는 악영향이 크기 때문에 많은 나라에서 충치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국민의 충치 예방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충치가 줄어들고 있다.

충치의 이환율을 알기 위해 많은 경우, WHO의 지침에 따라 만 12세 대상자를 기준으로 충치의 개수를 조사한다. 이 때 영구치아에서 평균 1개 이하의 충치경험(DMFT)을 보인다면 충치가 적은 것으로 충치의 발생이 적다고 본다. 그래서 많은 나라가 만 12세의 충치경험을 1개 이하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2세 충치경험이 평균이 1.8개 정도로 아직 충치가 많은 편이다. 

우리나라 역시 충치의 발생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충치 예방을 위한 국가 정책이 효과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선뜻 그렇다고 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수돗물 불소화 사업, 학교 불소양치 사업 등 대다수 충치 예방 사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줄어드는 충치의 발생에 대해 아직은 마땅한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다.

성경적 시각에서는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이야기를 한다. 죄로 인해 질병이 발생한다는 시각은 가끔 지성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곤 한다. 충치 같은 것도 죄의 결과일까? 필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탄수화물과 세균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탄수화물, 세균이 있으면 충치는 발생할 수 있다. ‘죄를 많이 지을수록 충지가 더 많이 발생한다’는 주장은 언뜻보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충치는 오래된 질병이다. 2000년 전 사기열전 같은 역사책에도 등장할 정도이니 근래에 생긴 병이 아님은 확실하다. 다만, 과거에는 충치의 발병 정도가 매우 적었다. 충치의 발생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설탕의 섭취가 증가하면서이다. 과거에 에스키모인들은 충치가 하나도 없었다가, 식생활이 서구화되면서 충치가 증가했다는 사례도 있다. 설탕의 섭취가 죄라도 되는 것일까?

설탕의 섭취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설탕의 섭취가 급격히 증가하던 시기에 비인간적인 행태가 벌어졌다.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보면, 그는 영국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잡아오는 노예들은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고, 배를 타고 오면서 3명 중 2명은 사망했다고 한다. 여자 노예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 겁탈을 당했다.

이처럼 비인간적 노예제도였지만, 부자들은 이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노예들 때문에 사탕수수 농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탕이 주는 달콤한 맛을 누리기 위해 인간을 동물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악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죽기 직전 노예제도가 폐지됐는데, 아마도 그는 행복하게 천국으로 갔을 것이다. 사탕수수 농장을 유지하기 위해 노예제도를 이용했던 끔찍한 죄악을 떠올리면 어쩌면 충치라는 것도 인간의 욕심이 불러온 질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성경적 시각에 대체로 동의한다. 실제로 다수의 병들이 문란함, 방탕함, 탐욕의 결과로 온다. 대사증후군, 심혈관질환, 코골이 등과 같은 질병은 대부분 살이 너무 많이 쪄서 생긴다. 탐욕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에이즈의 경우, 성적 타락으로 발생하는 질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떤 질병들은 한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사회적 죄의 결과인 경우도 있다. 환경오염 때문에 발생하는 천식, 결막염 등이 그 예이다. 과거 일본에서는 공장의 비양심적인 폐수 유출로 이타이이타이병, 미나마타병이 생기기도 했다.

질병을 죄의 결과로 보는 시각에 대해 혹자는 병에 걸린 사람에 대한 정죄의 시각을 우려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죄를 많이 짓지 않았음에도 병에 걸리곤 하는데, 산에 살면서 담배도 피우지 않은 한 유명한 스님이 폐암으로 사망한 경우가 그러하다.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다양한 질병은 가난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가난을 한 개인의 죄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질병을 꼭 한 사람의 죄의 결과라고 보기 보다는 개인적, 사회적 더 나아가 우주적 타락의 결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질병에 대한 유대인의 전통적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에 대한 중요한 예화가 있다.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고치신 기적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병이 왜 생긴 것인지 여쭤본다. 병은 죄의 결과인데, 날 때부터 맹인이었으니 본인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병보다는 그 병을 통해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에 주목하셨다. 어떤 질병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의 일에 쓰일 수 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의 질병이 낫기를 구했을 때, 하나님은 이를 통해 겸손함을 배울 수 있음을 알려주셨다. 질병 때문에 회개하고 성숙하는 사례들도 종종 있다. 소설 ‘낮은 데로 임하소서’에는 한 반신론자가 시력을 잃은 후, 하나님을 만나고 목사가 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처럼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생각을 가질 때에도 우리는 정죄의 시각이 아닌 긍정적 시각으로 병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면 질병이 사라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필자는 100%는 아니지만 대다수의 질병은 사라질 것으로 본다. 의사와 연구자가 사랑의 마음으로 질병 퇴치를 위해 노력할 것이고, 죄를 짓지 않는 인간은 면역력이 강해지는 등 더 건강해질 것이다. 기도할 때, 신앙을 가질 때 면역과 관련된 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인간의 건강 상태도 좋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천연두라는 무서운 질병이 지금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미래에는 다양한 질병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신명섭 치과원장(성누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