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9년,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한 국민들의 함성이 시작됐다. 한 달 전 동경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이후 국내에서도 불이 붙었고,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 33인이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100년 전 이 땅에서 기독교는 ‘서양에서 갓 들어온 신생 종교’에 불과했지만, 1907년 대부흥을 기점으로 ‘서서히 ‘민족 종교’로 자리잡게 된다. 1919년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은 그 ‘터닝포인트’였다.

그 시절 식민지 공간에서, 교회는 그나마 자유롭게 숨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민족 지도자들은 교회로 모여들었고, 성경과 기독교를 통해 꺾여버린 민족의 활로를 모색했다.

작지만 결연한 그들의 움직임들은 방울방울 모여 응축됐고, 마침내 하나님의 때에 ‘해방’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로 쏟아져 내렸다. 이후 해방 공간에서 공산주의를 이겨내고,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루는 민주공화국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그 중심에도 역시 기독교와 기독교인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기적같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오히려 날이 갈수록 ‘희망’이라는 단어는 현실에서 멀어지고 있다. ‘통일한국’과 ‘비전’ 대신, ‘헬조선’과 ‘소확행’이라는 단어 사이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내부의 윤리적 실패와 외부의 각종 압박 등으로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마땅히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이 민족과 나라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눈앞의 것들에 매몰돼 버린 소시민들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민족적 과제’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수준으로 높아진 우리에게 남아있는 숙제는 무엇인가. 바로 믿음의 선진들이 100년 전 외침을 시작으로 피흘려 쟁취한 독립의 ‘오메가 포인트’, 완성일 것이다.

독립이 ‘미완’으로 남은 이유는, 휴전선 너머 북한 주민들에게 민주공화국 체제를 선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을 맞이한 것은 한반도 전체였지만, 곧이어 들어선 공산주의 독재 체제는 38선(휴전선) 이북의 그들을 이전보다 훨씬 심각하게, 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다.

특히 불과 해방 5년만에 맞이한 동족상잔의 6·25 전쟁은 36년간의 일제 침략보다 더 많은 이들을 떠나보냈고, 살아남은 자들은 이별해야 했으며, 몸과 마음에는 상처를 생생하게 남겼다. 대한민국 현대사 속 적지 않은 굵직한 사건사고들 역시 따지고 보면 이 분단 체제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100년 전 선조들의 외침과 소원을 완성하기 위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다시 한 목소리로 외쳐야 한다. 민족을 이끌고 앞장서 북한 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부르짖고 행동해야 한다.

최근 북한전략센터는 김정은 3대 세습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처형과 숙청이 여전했음을 폭로했다. 집권 7년여밖에 되지 않았지만, 무려 450여명이 처형 또는 숙청됐다는 것이다. 1년에 64명 꼴이다.

특히 2013년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하면서 15명 이상을 함께 처형했고, 400여명을 숙청했으며, 문서 전달에 관여한 가장 어린 사람들에게까지 손을 댔다고 한다. 치가 떨린다.

아무리 김정은이 마치 예능을 찍듯 ‘열차 타고 하노이’를 간다 해도, 주민들을 압제하는 이상 폭압적 독재자의 이미지를 바꾸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조삼모사’ 같은 ‘미봉책’은 어림 없다.

가슴아픈 것은 김정은의 기차 육로 하노이행(行) 루트가 북한에서 국경을 넘은 탈북민들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목숨을 걸어야 겨우 살아날 수 있는 그 길을, 김정은은 최고 속도로 미끄러지듯 쇼를 하며 철통경호 속에 달려갔다. 이러한 장면을 보는 탈북민들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다 이루었다’며 거대담론을 회피하고 있는 이 시대 앞에서, 교회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시급한 이 문제의 해결에 앞장설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인식 개선과 함께 동참을 호소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교회 중심주의’에 빠져 세상을 회피하며 안주하고 있는 교회 내 성도들부터 깨워야 할 것이다. 제자훈련에서도, 철야기도에서도, 새벽기도에서도, 말씀 큐티에서도 오매불망 북한 주민들의 자유와 해방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먼저 온 통일’인 탈북민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돼야 한다. 무엇보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와 선행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단순히 ‘수혜자(受惠者)’로서가 아니라 ‘예비 시혜자(施惠者)’이자 동반자로서 대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교회는 탈북민들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나아가 4,000년 전 모세가 바로 앞에서 ‘내 백성을 가게 하라(출 5:1)’고 담대하게 외쳤던 것처럼, 우리는 이 땅의 위정자들에게도 ‘북한 주민들을 보내라’, ‘김정은이 아닌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이 숭고한 일에 앞장설 때만이, 다시 민족 앞에서 민족을 이끌어가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실 것이다.

등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