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앞둔 가운데, 한국과 일본 양국의 관계가 우려스럽다. 관광과 한류 등 민간 교류는 활발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악화일로에 있다. 잘 알려졌듯 3·1 독립선언서에는 자주독립 국가로서의 선언뿐 아니라, '동양의 영원한 평화' 실현이라는 웅대한 비전이 담겨 있다. 과거사 반성과 함께, 일본 선교를 위해서라도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설정이 절실한 때다. 이에 본지는 일본 기독교인들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과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서울 지하철 2호선 성수역 3번 출구로 나와 조금만 걸으면 오래된 건물 하나가 보인다. 4층 짜리 이 건물 꼭데기에는 '서울일본인교회'라고 적혀 있다. 이름 그대로 일본인들을 위한 교회다. 일본인인 요시다 코조(吉田耕三·77) 목사가 39년째 이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인생의 절반을 한국에서 살았다. 한국어에도 능한 그를 지난 20일 교회에서 만났다. 아래는 요시다 목사와의 일문일답.

요시다 고조(吉田 耕三) 목사
▲요시다 코조(吉田 耕三) 목사. 서울일본인교회 목회를 위해 1981년 한국에 온 그는 인생의 절반을 한국에서 살며 한일 간 화해와 화목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김신의 기자

-서울일본인교회는 언제, 어떻게 생겼나요?

"아시다시피 과거 일본이 한국을 점령했을 때,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전후해 남편을 먼저 하늘로 떠나보낸 일본인 여성들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그들은 가해자였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사정을 딱하게 여긴 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국인 목사님들이었죠. 그들은 미망인이 된 일본인 여성들을 위해 교회를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1975년 서울일본인교회가 처음 생겼습니다. 당시 한국인 목사님들은 일본어로 설교했는데, 미망인 여성들이 한국에 오래 살았지만 그래도 예배 만큼은 모국어인 일본어로 드러는게 좋겠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들은 '일본 때문에 억지로 일본어를 배웠는데, 이렇게 쓰이다니 이 또한 은혜'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럼 목사님께서도 그 때 한국에 오신 건가요?

"전 그로부터 6년쯤 후인 1981년에 처음 왔습니다. 그 땐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이니었고, 종로5가에 있는 연동교회 교육관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럼 이사는 언제 한 건가요?

"1992년에요. 우연히 만나게 된 일본인 여성 분께서 이곳 땅을 쓰도록 해주셔서, 감사하게도 옮기게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이 분도 오래 전에 이 교회를 다니셨더군요. 그 분이 제게 '목사님, 기도제목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오래 전 한국인 남편이 세상을 떠나며 자신에게 이 땅을 남겨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편이 남긴 이 땅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걸 원치 않는다며, 교회로 써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기도제목이었다고. 그래서 감사하게도 지금,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일본인 여성 분은 아직도 살아계세요. 올해 92살이십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되셨나요?

"제가 처음 한국에 왔던 건 지난 1974년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그 때 여의도 광장에서 '엑스플로 74' 대회가 있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일본인 1천명 정도가 여기에 참가했었죠. 당시 여러 나라에서 왔는데, 일본이 가장 많았어요.

그런데 밤 10시만 되면, 주최 측에서 외국인 참가자들을 숙소로 돌려보냈습니다. 저도 돌아왔는데, 숙소가 여의도 광장과 가깝다보니 그곳에서 찬양하고 기도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거예요. 결국 동료 몇 명과 함께 다시 광장으로 나갔습니다. 정말 큰 은혜가 임했던 것 같습니다. 밤 새도록 그곳에서 찬양하며 기도했어요. 결국 새벽기도회 때까지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생각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이 저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고민을 하다 제가 내린 결론은 3.1운동이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의 울분과 저항이 그렇게 터져나왔고,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어 오늘날 이렇게 한국교회가 부흥한 것이라고 저는 확신했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계속 3.1운동과 한국, 일본의 근대사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마땅히 알아야 할 역사를 몰랐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무지도 죄가 될 수 있다는 걸 그 때야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마태복음 5장 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것이 제가 1981년 선교사로 한국에 온 이유입니다. 전 단지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을 목회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 전, 형제와 먼저 화목하기 위해 이 땅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태극기
▲요시다 목사가 이끄는 ‘스터디 투어’를 마친 일본의 기독교 미션스쿨 학생들이 태극기에 남긴 소감. 과거 일제시대 역사의 현장을 직접 체험한 학생들은 깊은 감사의 마음을 이 태극기에 남겼다고 한다. ⓒ김신의 기자

-한국과 일본은 어떻게 화목할 수 있을까요?

"그 첫 단추는 과거를 바로 직시하는 것입니다. 먼저 일본이 그래야 합니다. 일본은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인 대한민국을 침략해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을 핍박했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일본은 이 역사적 범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사죄해야 합니다. 비록 아픈 과정이지만, 이것 없이 한국과의 관계를 화복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을 찾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스터디 투어'라는 걸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탑골공원이나 서대문형무소, 안중근기념관, 제암리교회와 같은 역사의 현장을 찾아 갑니다. 과거 일본이 한국에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바로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를 계기로 한일 교회 사이에 교류가 일어나, 한국의 교회는 벚꽃을, 일본의 교회는 무궁화를 각각 그들의 교회 앞에 심어 우애를 다진 일화도 있습니다.

또 한 번은 일본에 있는 기독교 미션스쿨 학생들이 한국을 찾아 저와 함께 일주일 동안 역사의 현장을 둘러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태극기에 소감을 적어 제게 선물로 주었는데, 하나같이 '역사를 알려주어 고맙고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때마다 큰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한일의 화해를 위해 기독교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이야 말로 기독교가 앞장서야 할 때입니다. 서로 갈라진 것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풀기는 어렵습니다. 양국의 교회가 먼저 하나 되어 각 국가를 선도해야 합니다. 인간에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껜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은 일본보다 개신교가 더 늦게 들어왔는데도, 지금은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흥했습니다. 일본인으로서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이건 저 뿐 아니라 많은 일본 교회가 궁금해 하는 부분입니다. 제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한국은 역사적으로 고난을 많이 당한 민족이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위로를 많이 받은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어느 역사학자가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9백번 이상 침략을 당했다고 해서 제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일제 때도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들이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절하다 순교를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분들의 눈물과 희생, 인내가 오늘날 꽃피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시다 고조(吉田 耕三) 목사
▲요시다 목사는 “한일 양국의 화해를 위해 지금이야 말로 기독교가 앞장서야 할 때”라고 했다. ⓒ김신의 기자

-이 교회에선 일본인들만 예배를 드리나요?

"한국인들도 있습니다. 비록 작은 교회지만 일본인과 한국인이 함께 하나님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보며 얼마나 기뻐하실까'를 늘 생각합니다. 한때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였는데, 이젠 주님 안에서 회개와 용서를 통해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하나가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