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다 가이치
▲소다 가이치 목사(가운데 앉아있는 이 오른쪽)가 영락보린원 마당에서 원생들의 운동회를 지켜보고 있다. ⓒ영락보린원 제공
소다 가이치 옹은 비교적 최근의 인물임에도, 그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겸손한 그의 성품 때문이다. 해방 후 건너간 일본에서의 15년간 삶도 마찬가지다. 본지는 전편에 이어 일본 자료들을 바탕으로 소다 가이치가 고국으로 돌아간 이후의 삶과 한국 귀환, 그리고 마지막 1년간 영락보린원에서의 삶을 간략하게 조명했다. -편집자 주

알려지지 않았던 고국 일본에서의 전도와 생활

일본 본토 혼슈 남단 주코쿠와 시코쿠, 규슈에 에워싸인 내해 세토나이카이 해상국립공원에 떠 있는 쇼도시마 섬. ‘올리브섬’으로 알려진 이곳은 카가와 배로 1시간 거리의 북쪽에 있는 섬이다. 여름이면 매일 수천 명이 몰려든다는 관광지 속에서도 조용하고 아름다운 우치노우미 해변 인근, 조그마한 촌락 카타죠에는 작은 교회가 하나 있다.

소다 가이치가 바로 이곳에서 목사대리(보다는 교회지기)로 일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이곳을 중심으로 한 소다 가이치의 일본 ‘전도행전’이 부분적으로나마 한 문서에 의해 최초로 공개됐다.

일본의 전통 관습이 강하던 농촌에는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리기 어려운 당시였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한 그리스도인 퇴역 군인에 의해 1947년 7월 설립된 이 교회는 카가와 도요히코의 강연회 이후 성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을 맡고 있던 목회자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떠나게 됐을 때, 당시 평화운동을 하며 전국을 순회하던 80대의 소다 가이치를 맞게 됐다.

소다 가이치
▲소다 가이치가 약 1년간 시무했던 우치노우미 교회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소다 옹은 우치노우미 교회와 쇼도시마 전도를 제안받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습니다. 노령의 저를 불러주시면 기쁘게 가겠습니다. 부디 쇼도시마에 적당한 목사가 올 때까지 저를 보내주십시오. 저는 예전부터 성 프란치스코를 본받아 탁발승 생활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무급도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이 나의 신조입니다”라며 두 개의 붓글씨를 보여줬다. 첫째는 無一物中無盡藏(무일물중무진장)으로, 고린도후서 6장 10절 성구를 좌우명과 생활신조로 삼은 것이다.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斷行聖靈助之矣(단행성령필조지의)로, ‘단호히 행하면 성령이 반드시 도와주신다’는 의미다.

1년이 채 못 된 섬 전도와 목회였지만, 그는 특유의 온화함과 관대함, 묵묵히 참고 따르는 생활태도, 무욕과 청렴한 내빈 생활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줬다. 그가 떠난지 20년 후까지도, 남아있던 성도들은 마음으로부터 소다 전도사의 유덕을 추모하고 존경했다고 한다.

당시 그에 대한 주변의 증언이다. “생활은 매우 검소하셔서 가을 수확기에 감귤이나 고구마를 보내드리면 아주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겨울에 접어들어 추워져도 교회에는 난방이 되지 않아 전기 코다츠를 사드렸더니 아주 기뻐하셨던 것도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소다 가이치
▲소다 가이치가 약 1년간 시무했던 우치노우미 교회 내부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일본 양로원에서의 10년과 한국 YMCA의 초청

1951년 쇼도시마 우치노우미 교회지기 생활에서 물러난 85세의 소다 가이치 옹은 오랜 친구 야다 목사가 창설한 아카시 우에노마루 애로원(양로원)에 머물렀다. 거기서 그는 기도집회와 주일예배 설교를 맡았고, 애로원 사람들과 아카시 거리 사람들의 의논 상대가 됐다. 그는 귀국 후 처음으로 조용히 자신만의 방에 머물며 성경을 읽거나 좋아하는 한시를 지을 수 있었다.

소다 옹은 3년 뒤 1m 정도의 자연석에 ‘평화’라는 글씨를 새겼다. 그의 평화 사상은 종전 후 많은 사람들이 말하던 ‘평화’가 아니라, 88세에도 여전히 한결같이 추구했던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는 전후 일본이 전쟁 폐기를 주장했던 ‘평화선언’을 진정한 평화로 보지 않았고, 인간의 마음 속에 미움이 남아 있는 한 언제든 쉽게 물러가는 ‘위장 평화’라고 여겼다.

또 당시 세계 정세를 넓게 바라볼 때, 거기에는 진정한 평화 없이 서로 싸우는 두 개의 세계와 사상이 대립하고 있어, 지금이라도 큰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내재돼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세계평화’의 경종을 계속 울리고 ‘복음선포’를 통해 사해동포와 만민협조의 사회 건설을 도모해야 하고, 이 일을 위해 고국에서 업신여김을 당하면서도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야다 목사는 소록도 한센병 구호시설에서 5년간 봉사했던 인물로, 소다 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애로원의 보물이고 빛이었다. 동시에 일본의 자랑이자 크리스천의 거울이었다. 이토록 복잡한 정세가 된 한일 양국을 융화시킬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88세의 소다 가이치 목사는 종전 10주년을 맞아 도쿄의 한국 YMCA로부터 초청받아 평화기념일인 11월 11일 도쿄를 방문한다. 도쿄의 YMCA는 종전 10년을 맞아 한국인들을 도운 일본인들을 초청했다. 이 모임과 그에 대한 소다 가이치의 다음 말 속에는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적용할 만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한일 관계 일체가 바람직하지 못하며 너무도 불쾌한 일이 많은 이 무렵, 기획자의 따뜻한 마음이 진정으로 기뻤다. 종전 후 1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한국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성실의 사업을 했던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는 일본인으로 어떤 사람이 있을지 나는 그것만 생각했다.”

이 모임에 초청된 ‘한국을 도운 일본인’은 11명이다. 소다 부부와 함께 가마쿠라 보육원 경영에 힘썼던 스다 켄타로우 선생,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세워 1907년부터 해방까지 한국인 교육에 공헌한 마스토미 테루코 여사, 1905년부터 40년간 빈곤층의 조산과 구제사업에 전념한 가와무라 노리 여사, 군산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농민진료소를 열어 무의농촌 의료사업에 공헌한 구마모토 리헤이 옹, 1913년부터 20여년간 고아와 장애아의 교육사업에 헌신했던 스도우 노부시의 부인 소드우 쵸우 여사 등이다.

또 20여년간 조선공예미술에 순수한 애정을 쏟아 <조선자기>, <조선소반> 등을 남긴 아사카와 타쿠미의 부인 아사카와 사키코 여사, 혜화전문학교 교장으로 20여년간 청년교육과 불교연구에 진력한 에다 토시오우 선생, 화광학원을 세우고 20여년간 한국인 아동교육과 사회사업을 했던 아키노 미츠 여사, 한국인 전도에 힘쓰고 재일한국인교회를 위해 봉사중인 모리 후지 여사, 한국인 전도에 반생을 바치고 교토한국인교회 목사로 재임중이던 오다 나라치(전영복) 목사 등이다.

소다 가이치 한경직
▲1961년 돌아오는 소다 가이치 옹을 맞으러 나온 한경직 목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 사람들의 모습. ⓒ영락보린원 제공
한국으로의 귀환, 그리고 소천과 국교 정상화

소다 가이치 선생은 말년을 한국에서 보내길 원했다. 그가 93세 되던 1960년 1월 1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한국 대통령 이승만의 오랜 친구인 소다 옹이 한국 귀환을 열망한다’는 기사를 썼다. 이를 서울 AP통신 기자가 다시 한국 신문에 보도해 관심을 끌었다.

가마쿠라 보육원을 이어받아 영락보린원을 운영하던 한경직 목사는 “소다 옹이 제2의 고향 한국에 오겠다는 것을 열렬히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961년 3월, 재정보증서와 초청장을 보냈다.

그해 5월 6일 소다 옹은 오사카를 떠나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94세의 소다 옹은 공항에서 한경직 목사와 당시 NCC 총무 길진경 목사, 옛 친구인 서울 YMCA 이명원·이인영 선생, 김우현 목사, 베이커 협동총무, 전택부 선생 등의 환영을 받았다.

소다 가이치 한경직
▲한경직 목사의 추도식 모습. ⓒ영락보린원 제공
14년만에 귀환한 그는 고아들을 무릎 위에 앉히고 행복해했다. 그러나 한국에 온지 1년도 안 된 1962년 3월 28일, 9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한 달 뒤인 4월 28일, 우리 정부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소다 옹의 장례식은 1962년 4월 2일 시민회관에서 사회장으로 거행됐다. 영락보린원과 YMCA를 비롯해 NCC, 한국사회복지사업전국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등 문화·종교·교육·경제 등 19개 단체가 공동 주최했고, 장지는 당시 양화진 외인묘지였다. 묘비 글은 주요한 선생이 지었고, 글씨는 김기승 선생이 썼다.

서거 1개월 후인 4월 28일 일본에서도 추도식이 거행됐다. 2년 후인 1964년 한국에서도 추도식이 준비됐다. 서울 YMCA 강당에서 거행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반대 전화와 협박장이 사방에서 YMCA로 날아들기도 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여론이 들끓던 시절이었다.

국교 정상화 전이라 일본인을 정식으로 초청하기 힘든 때였지만, 소다 옹의 조카와 고향 방장신문 사장 후우라와 아베 내외가 왔다. 아베의 부인은 전 수상 기시의 딸이었다. 기시는 소다 옹의 고향 사람으로서 소다 가이치를 매우 존경하는 친한파 정치인이어서 직접 참석하려 했지만, 사정이 생겨 딸과 사위를 보낸 것이다.

소다 가이치
▲셔우드 홀 선교사 묘지 뒤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소다 가이치 부부의 비석. ⓒ이대웅 기자
전택부 선생은 “소다 옹은 한일 국교 정상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헤아려 보건데, 한일 국교 정상화는 소다 옹 서거 3년 2개월 후인 1965년 6월 22일 성립했다”며 “추도식에 참석한 방장신문 사장은 귀국 후 한국 방문기에서 조속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역설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국교 정상화 조약이 체결됐으니, 어찌 소다 옹의 평화 정신과 관계 없는 일이라 하겠는가”라고 적었다.

추도식에서는 한경직 목사의 사회와 박주병 보건사회부 장관, 윤치영 서울시장의 추도사 등이 따뜻하고 친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소다 가이치 부부는 폐결핵 전문 의료선교사로서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던 셔우드 홀 캐나다 선교사(1893-1991)의 묘지 뒤 아담한 자리에 안장돼 있다. 소다 가이치의 일생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아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