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남궁억은 남의 땅이 된 거리를 내려다보며 손을 들어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훤한 이마에 굵은 주름살이 꿈틀거렸다.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하곤 돌아서서 신문사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어둡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창간 이후 쭉 일본의 야욕과 횡포를 비판해 온 황성신문은 이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총독부는 눈엣가시 같은 이 민족의 신문을 요번 기회에 아예 없애 버리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다. 숨통을 꽉 졸라 곧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남궁억에게 황성신문은 마치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12년 전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이 신문을 창간했던 것이다. 그때 이미 나라의 운명은 기울어 가는 저녁해와도 같았다. 어두운 때일수록 등불이 필요했다.

그는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민족에게 등대 불빛이 되어 주고 싶었다. 한반도를 한입에 집어삼키려 호시탐탐 노리는 외세의 검은 속셈을 고발하고 조정의 부정부패를 파헤치며 백성들을 일깨워야만 나라를 살릴 길이 열린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어렵고 고달팠던 일, 그런 중에도 한편으론 보람을 느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여러 차례 경무청의 감옥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육신이 찢어지는 고통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마음이 괴롭지는 않았다. 그때는 조금이나마 희망의 빛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저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사장직을 사임하고 장지연에게 넘겨주었지만 여전히 관심의 줄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친자식 같은 신문의 마지막 나날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오로지 민족의 앞날을 밝히기 위해 만든 신문이었기에 더욱 마음이 캄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누구에게 지혜를 빌려야 나아갈 길을 알게 되리오!’

남궁억은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신문사 문을 나섰다. 한여름인데도 그는 흰 한복을 단정히 입고 있었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와 두루마기 자락을 날렸다.

쉰 살이 가까운 나이인데도 그의 풍채는 당당했다. 선이 굵은 수려한 이목구비에 허연 수염이 휘날리는 헌헌장부의 모습이었다.

핏빛처럼 붉은 도리우찌를 푹 눌러 쓴 젊은 사내 하나가 멀찍이서 남궁억의 뒤를 미행했다. 일본 경찰은 혹시 일어날지 모를 한국인들의 저항과 데모 사태를 막기 위해 여러 정치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지식인들의 동태를 세밀히 파악해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 명만 모여도 검문을 하고 마구 연행해 가기도 했다.

남궁억은 흘낏 뒤돌아보곤 사내를 따돌려 버리려고 갖은 방법을 썼지만 찰거머리처럼 따라붙는 녀석을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 고민을 나누고 앞날을 의논하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밀정의 감시를 벗어나기도 어렵지만, 만약 경찰의 경고를 무시하고 누굴 만나는 등 수상한 행동을 했다가는 백주 대낮에 미친개들에게 무슨 테러를 당할지 모를 노릇이었다.

한서 남궁억
▲남궁억 선생의 동상. ⓒKIATS 제공
“쥐새끼 같은 놈.”

남궁억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스름 녘에 남궁억은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늙은 어머니와 부인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그래도 가장이 별탈 없이 귀가하자 한숨들을 쉬며 저녁 밥상을 준비했다.

그러나 남궁억은 냉수 한 그릇으로 마른 목을 축였을 뿐 수저는 들지 않았다. 입맛이 전혀 없는지 마룻바닥만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모기떼가 앵앵거리며 피를 한 방울이라도 더 빨아 먹으려고 달려들었지만 그는 그 흡혈귀들을 쫒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원통하더라도 몇 술이나마 뜨시게나. 그래야 정신을 채려 헤쳐 나가지.”

늙은 어머니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부인도 그래야 한다는 듯 수저를 들어 주었다. 그러나 남궁억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 고개만 가볍게 저으며 한숨을 뱉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못 먹겠군요.”

그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부인의 손을 살짝 잡아준 뒤 일어서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서재로도 쓰는 그곳엔 많은 책들이 단정히 정돈되어 있었다.

남궁억은 의자에 앉아 태극 문양이 놓인 부채를 집어들어 두어 번 부쳤다. 그러나 곧 부채를 놓고 두 손을 모아 턱을 괴었다. 그는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나의 국가가 어찌 이토록 허망하게 사라져야만 했던가? 생각할수록 두려운 일이다. 이제 앞으로 일본은 친일파를 제외한 한민족 백성들을 개돼지보다 더 못하게 취급하고, 제 기분대로 얼굴에 침을 뱉거나 히히 웃으면서 마구 죽일 것이다. 아, 어찌해야 하는가?”

밤이 깊어갔으나 그는 잠들지 못한 채 깊디 깊은 한숨과 신음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멀리서 첫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무심중에 자리에 들기는 했으나 이리저리 뒤척거리기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동녘의 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하룻밤 사이에 퍽이나 수척하고 머리카락도 더 하얗게 세어 버린 듯했다.

그는 아내가 들고 온 물을 한 모금 넘기긴 했으나 그날 내내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늙은 어머니와 아내의 간청에 못 이겨 수저를 들었다가도 아무런 식욕이 없는지 내려놓고는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그는 닷새 동안이나 침식을 잊은 채로 고민하고 있었다. 마음이 심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는 몸도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은 핼쑥하고 핏발이 선 눈은 깊은 우물처럼 퀭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눈동자에서는 이상하게도 강렬한 빛이 났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