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인간을 얽매고 불안하게 하는 원인이 신(神)에 대한 두려움이기에, 평안을 누리려면 신을 부정하고 인간을 궁극의 존재로 만들어 신의 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가 있다. 니체(F. W. Nietzsche, 1844-1900), 사르트르(Sartre, Jean Paul, 1905- 1980)가 그 주창자이다.

반면 키에르케고어(Søren Kierkegaard, 1813-1855), 칼 야스퍼스(K. T. Jaspers, 1883-1969) 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도 있다. 이들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달리, 인간의 ‘존재적 불안(Existential Anxiety)’을 해소하기 위해 오히려 유신론을 차용(借用)한다.

다만 이들은 신(神)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 ‘구복(求福)’의 형태가 아닌, ‘복종과 충성’의 신앙 형태를 채택한다. 종교란 ‘존재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것인데, 사람들이 신앙을 갖고도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구복(求福)’ 곧, 신(神)에 대한 ‘미심쩍은 기대(doubtful expectation)’ 때문이라고 그들은 본 것이다.

신에 대한 ‘미심쩍은 기대’를 불안의 시원(始原)으로 본 그들은 불안을 떨치기 위해 그것을 ‘복종과 충성’으로 대체시켰다. 불교가 욕망을 떨쳐내므로(解脫) ‘존재적 불안(existential anxiety)’을 해결하려고 했다면, 그들은 신(神)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통해 존재의 불안을 떨쳐내려 했다.

알라(Allah)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충성’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이슬람교 역시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전형이다. 그들은 말마다 ‘알라에게 충성과 복종(loyalty, obedience to Allah)’을 외치니, 열렬한 신본주의자들로 비치나 사실 그것은 그들의 ‘존재적 불안’을 떨쳐내기 위한 일종의 메커니즘(mechanism)이다. 유대교(Judaism) , 이슬람교(Islam)를 비롯해 모든 종교적 실존주의는 다 신본주의 의 탈을 쓴 인본주의이다.

빈자(貧者)의 성녀(聖女)라 불리운 ‘테레사(Teres) 수녀’가 일생 하나님께 ‘충성과 복종’을 드렸던 것도, 어쩌면 자신의 ‘존재적 불안(existential anxiety)’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나 싶다. 이는 그녀의 전기(傳記)에서도 감지된다.

테레사 수녀의 전기 ‘Mother Teres: Come Be My Light’에 의하면, 그녀는 자신이 수녀로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1948년에서 1997년 사망할 때 까지 50여 년 동안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으며, 한때는 천국과 신(神)의 존재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드러냈다. 안타깝지만 그녀는 평생의 헌신으로도 자신의 ‘존재적 불안’을 떨쳐내지 못했다.

일견 구복(求福)적이지 않고 ‘복종과 충성’만을 바치려는 신앙 태도는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비춰질 수 있으나, 그것은 미심쩍은 기대(doubtful expectation)에서 생기는 불안을 생성시키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 방어책이다. 과도히 구복(求福)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종교적 실존주의자들이 많다.

실존주의(實存主義)의 다른 단면은 그들이 신앙을 언제나 삶과 직결시킨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복종’이 실천적 삶으로 구현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어를 중요한 멘토 중 하나로 삼는 ‘무교회주의’의 한 지도자가 “기독교적 삶을 살아내는 것이 너무 어렵기에, 나는 누구에게 감히 기독교를 권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실존주의의 한 전형이다.

그들에게 이론적 신앙이란 없다. 그들은 오직 실천에서 신앙의 증거를 찾는다.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살아내는(to live)’ 것이다. 그들의 판단 기준은 오직 실천이며, 삶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는 성경적 개념과 거리가 있다. 성경적 실천 동기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읍(感泣)이라면(요 14:15, 21-24), 그들의 실천 동기는 ’존재의 불안‘을 떨치기 위한 일종의 안간힘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자기 개인의 실존이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므로서 ’존재적 불안(existential anxiety)‘을 근원적으로 떨쳐냈다. 이후 그들이 살아야 할 이유도,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동기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이고(고후 5:14 갈 2:20), 하나님 영광이다(고전 10:31).

또한 실천을 중시하는 실존주의자들에게는 ‘구원의 지식’, ‘영적 깨달음’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gnosticism)나 구원파가 당연히 공격 대상이다. 삶과 무관하게 영적 체험만을 쫓는 신비주의(mysticism)역시 그들의 혐오 대상이다.

그들은 영적 체험보다는 실천적 삶을 살아내는 것이 목표이기에, 언제나 구도자(求道者, seeker)적 태도를 취한다. 역사적으로 섬김과 봉사를 모토로 하는 공동체 운동들은 사실 종교적 실존주의를 근간으로 구축됐다.

그들은 설교에 대해서도 그들 나름의 기준을 제시한다. 설교자들에게 성도들이 삶에서 구현될 수 있는 실천적인 것만 설교하고, 삶과 유리된 구름을 잡는 설교는 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또 그들은 “의원아 네 병이나 고치라(눅 4:23)”는 구절을 인용하며 설교자 자신이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은 설교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설교에서 추상적인(?) 내용을 다 배제시킨다면, ‘구속의 도리’, ‘영생’, ‘천국과 지옥’ 같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내용은 다 배제되고 윤리만 남는다.

또 설교자가 실천 가능한 것만 설교해야 한다면, 모든 설교자는 자괴감(自愧感)으로 당장 강단에서 내려와야 한다. 설교는 윤리성을 담보로 하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이나 ‘구용구사(九容九思)’같은 도덕 강화(講話)가 아니다. 어느 신학자의 말대로 설교는 ‘죄인이 죄인에게 하는 권면’이며, 동시에 초자연적인 성령 주도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나귀(민 22:28)’와 ‘돌들(눅 19:40)’을 통해서도 말하게 하실 수 있다. 복음 전도자를 ‘소리(마 3:3)’, ‘질그릇(고후 4:7)’으로 지칭함은 전도자는 복음을 나르는 도구에 불과함을 말한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이는 질그릇 같은 죄인을 통해 복음이 전해진다는 뜻일 뿐더러, 하찮은 무지렁이들(a dunce)의 전도를 통해서도 구원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 것이다.

복음이 능력있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전도자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능력 있게 하시는 하나님 때문이고, 복음을 믿도록 하는 것은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택자를 부르시는 방편으로 ‘사람의 행위’가 아닌 ‘복음’을 택하셨다. 타락 전에도 하나님이 ‘그의 형상’ 인간이 아닌, 성자 로고스에 의해 알려지셨다면(요 1:1),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행위)이 파괴된 후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질그릇 같은 죄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알려지도록 하셨다.

마지막으로 ‘존재적 불안(existential anxiety)’에서 벗어나는 길은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절대자에 대한 ‘복종과 충성’으로 되지 않음을 말하고자 한다.

인간의 ‘존재적 불안’은 아담이 범죄 후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고 한데서도 알 수 있듯, 죄(罪)가 그 근원이다. 죄를 해결하기 전에는 ‘존재적 불안’은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존재적 불안’을 회피의 방식이 아닌, 율법을 통해 그 원인인 죄를 직면시킨 후, 정죄를 받아 그리스도께 가게 함으로써(갈 3:24) 해결하신다. ‘평안’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죄의 장벽이 제거될 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종교적 실존주의자들이 채용한 ‘복종과 충성’은 죄를 직면함 없이 ’존재적 불안(existential anxiety)‘에서 벗어나려는 꼼수이다. 그것의 원인인 죄의 직면 없인 그것에서의 탈출도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죄를 직시하기보다는 온통 존재에 대한 관심뿐이니 정곡(正鵠)에 이르지 못하고, 불안을 벗어날 수도 없다. 그들이 ’존재적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채용한 신(神)은 죄의 직면 없이 그것을 해결하려고 만든 가상(假想)의 존재일 뿐이다.

죄를 직면하지 않는 신앙은 기독교신앙이 아니다. 죄의 직면 없인 그리스도도 불필요하며, 그리스도 없이는 ‘존재적 불안’이 해결되지 못한다.

죄를 직면하는 것이 ‘존재의 불안’을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죄를 직면함 없이 ‘존재적 불안’을 해결하려는 실존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문을 통하지 않고 들어오려는 도둑이며 강도이다(요 10:1).”

이즈음 ‘파괴한 후 세운다(destroy, and construct)’는 반 틸(Cornelius Van Til) 교수의 말이 귓전을 때린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의 불안’을 근원적으로 떨쳐낸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존재적 불안’을 떨치려 채용(採用)한 가상(假想)의 신에게 끝없이 ‘복종과 충성’을 바치는 종교적 실존주의자인가?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