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어떤 기준 안에 들어감으로써 획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얻은 14만 4천명의 무리는(계 14:1) 수많은 경쟁을 통해 열종(劣種)은 탈락되고 최종적으로 남은 우종(優種)들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성경에 의하면 구원은 인간 노력의 산물이나 강자의 획득물이 아니라, 구원에 전혀 기여할 수 없는 전적 무능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뱀을 바라보고 살아난 것이나(민 21:09), 베데스다 연못가의 절체절명의 38년 된 중풍병자가 구원받은 것이나(요 5:2), 십자가의 강도가 구원받은 사실은(눅 23:43) 그 확증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갈 3:10)”고 한 성경 말씀처럼, 자기 의를 세우려거나 구원에 뭔가를 기여하려는 자에게는 구원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세상의 열등자, 낙오자 같은 무지렁이들(a dunce)의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세상의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것들(the things that are not)을 택하사(고전 1:26-28)”.

만일 구원이 강자들의 리그(league)라면, 이런 무지렁이들은 다 구원에서 탈락돼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할 때는,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 구원에 뭔가를 기여할 수 있을 만큼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약하게 만들어 구원하십니다. 구원의 패러독스(paradox) 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구원 작정에 든 자 중 자구책(自救策)을 강구하려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로 넘어지게 한 후,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어 구원하십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섰다(stood)’는 말 속에는, ‘자립(自立)’의 의미가 함의돼 있습니다.

그리스도 의립(依立, be stood)을 중단하고 자립(自立)을 도모하는 순간, 넘어지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의 존립이 그리스도께 의존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섰다’는 말이 가당치 않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내가 연약할 때에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라는 찬송가 가사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자들을 지향하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이 원리는 ‘신앙의 레이스(The Race of Faith)’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성경에는 신앙의 경주를 격려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신앙 경주에서 이기도록 경쟁 심리를 부추기고 잠재력을 일깨우려는 듯 보이는 것들이 더러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는 말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언뜻 들으면 “이등은 없다. 상 받는 이는 오직 일등 한 사람이니 일등이 되려면, 피터지게 죽기 살기로 뛰어야 한다. 신앙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무한 경쟁이다”라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상 얻는 ‘일등(一等)’은 자력(自力)으로 쟁취한 획득물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의존의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일등이란 다른 사람을 탈락시키고 최종 경쟁에서 살아남은 1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의존하여 달린 경주자는 모두 일등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그들로 달리게 하신 분이 그들 안에 계신 동일한 한 그리스도시기에, 차등을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 골인한 자도, 맨 마지막에 골인한 자도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골인한 자들이니, 모두가 ‘일등(一等)’, 곧 ‘그리스도 등(等)’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그리스도 의력(依力)으로 신앙 경주를 한 자는 먼저 들어오든 나중에 들어오든 모두 일등이고, 자력으로 뛴 자들은 등수에 상관없이 모두 등외(等外)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능력은 인간 내면의 잠재력을 일깨우거나 자력갱생(自力更生)을 부추긴 방식으로 산출(産出, output)된 것이 아닌, 오직 그 안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결과물입니다.

기독교는 인간 자력으로 하는 모든 것을 죄로 여깁니다. 기독교의 최고 덕목 중 하나인 겸손은 단순히 인간들 사이의 겸양지덕(謙讓之德)의 예(禮)가 아닙니다. 하나님 절대 의존의 결과로서의 자존(自存), 자력(自力), 자립(自立)의 부정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표상으로 말한 ‘할례당’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빌 3:3)”도 자존(自存), 자력(自力), 자립(自立)을 부정하는 신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말한 것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의 최종 결론처럼 보입니다.

‘강자(強者)’에 대한 성경적 정의(定義) 역시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개념과는 상반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강자’는 ‘약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리스도께 의존된 자’를 뜻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25)”는 말씀의 확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하나님 의존적 ‘강함’은 차력술(借力術)처럼, 여전히 자신이 주체가 된 채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 산출해 낸 결과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사시는 그리스도(갈 2:20)의 능력이 그를 통해 발현(發顯)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는 말씀 그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동력과 능력이 자기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하러 나갈 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고 한 것은 단지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무기로 삼아 나아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다”는 말은-이름이 곧 그의 존재 자체이듯-하나님으로 나아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가 주체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무기로 들고 나갔다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믿음을 운반 도구로 삼아 하나님이 나아간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 역시 같은 개념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오는 차력(借力)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통해 나타낸 능력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것 도(요일 5:4) 내가 믿음을 이용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긴 ‘그리스도의 이김’을 믿음으로 우리 것 삼는다는(고전 15:57) 뜻입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인간의 열심과 의지를 분발시키려는 것처럼 오해돼 사람들을 낙담시키는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입니다. 이는 흔히 상상하듯, 수백 대 1의 경쟁을 뚫고 들어가는 명문대 입학이나, 대기업 입사같이 피터지게 경쟁해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구원의 문이 좁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구원을 주는 복음은 오직 성령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기에(고전 2:8-14) 타고난 인간 지성이나 종교적 열심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롬 10:2, 고전 2:9) 뜻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는 말씀 역시, “구원의 길은 워낙 힘든 고행의 길이라 사람들이 가기를 싫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이 그런 것이라면 경쟁력 없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시 145:14)”는 하나님의 경륜과 배치됩니다.

그리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같은 말씀들도 부정돼야 합니다.

그 말씀의 진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들어가는 ‘구원의 문’은, 멸망할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여 찾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이처럼 구원의 길, 신앙의 레이스는 실력과 자신감으로 충만한 강자들의 리그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설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약자들의 리그입니다.

당신은 너무 죄가 많고 무능하여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날마다 신앙 레이스에서 패배만 한다고 낙심천만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런 당신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십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