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빈소
▲한 장례식장의 모습(기사의 내용과 직접적 관계가 없습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Q) 기독교 장례, 매장이 옳은가요? 화장이 옳은가요?

A) 다른 나라에 비해 인구 밀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매장보다 화장을 하는 빈도가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도 화장을 택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 문제에 대해 문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을까요? 아쉽게도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직접적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일부 사람 가운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죽음과 장례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 반드시 매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요셉은 타향 애굽 땅에서 애굽 총리로 살다 죽으면서 훗날 자신의 유해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땅으로 메고 올라갈 것을 요구합니다(창 50: 25). 이 요셉의 경우를 기독교 장례의 모범으로 삼으려는 것이지요. 하지만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명을 받기 이전 애굽 땅에서 일어났던 이 상황을 그대로 적용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만일 요셉의 장례 방식을 기독교 장례의 모범으로 권장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 모세가 창조주 하나님께 직접 받은 613가지 율법 가운데 요셉의 장례 방식을 따르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 있었어야 겠지요. 하지만 그런 명령이나 권유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다만 죽을죄를 지어 나무 위에 달려 처형당한 사람의 시체는 밤새도록 나무 위에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해야 했는데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 받았기 때문이라는 규례가 있습니다(신 21: 22-23). 사도 바울은 이 율법을 인용하면서 나무에 달려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분명하게 전합니다(갈 3:13).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대 법으로 볼 때 그 어떤 죽음보다 처참한 저주였던 것입니다.

애굽 장례가 시체를 방부 처리한데 반해 팔레스틴에서는 보통 시체를 방부 보존하지 않고 죽은 지 수 시간 안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예수의 시체도 그렇게 장례 되었습니다. 유대 관습에 따라 관도 없었고 시체는 씻어서 향유를 바르고 세마포로 급하게 쌌습니다(요 19:40). 저주 받은 시체를 그대로 두어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지요(신 21:23).

하지만 부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으며 이것이 기독교 장례 풍습으로 규정된 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이런 전통 규례를 신앙적으로 권장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율법조차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갈 3:12).

둘째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런 요셉의 장례법이 권장되거나 실행되어 왔고 교회도 그 방식을 따랐다는 교회사적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효자 요셉은 애굽의 관습을 반영하여 아버지 야곱의 죽음에 시체 부패를 막기 위해 40일 동안 향을 넣고 70일 동안 곡(哭)하였으며 요단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큰 소리로 울며 거기서 관습대로 7일 동안이나 다시 애곡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땅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 울음 소리를 듣고 "애굽 사람들이 크게 애통하는 소리"라고 했지요(창 50: 2-11). 고령의 147세에 사망한 야곱의 죽음에 대한 이 같은 풍습과 애곡은 크게 애곡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역사상 전통적 교회의 장례 풍습이나 한국 교회의 장례 풍습에 비할 때 분명 낯선 풍경입니다.

이 같은 성경과 역사의 교훈을 살펴볼 때 기독교 장례에 있서 어떤 중요한 규례가 내려왔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매장이냐 화장이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비참하게 화형 당한 기독교 순교자들도 많았습니다. 성경이 규정하지 않는 이상 매장이냐 화장이냐의 여부는 중요하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부자의 죽음이든 거지 나사로의 죽음이든 화려한 죽음이든 비참한 죽음이든 십자가 달린 저주 받은 강도의 죽음이든 부활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 자체가 기독교의 중요한 본질이 아닐뿐더러 이 땅은 영원히 안식할 땅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아브라함이 본토 아비 집을 떠난 것처럼 갈대아 우르든 하란이든 가나안 땅이든 죽음의 장소나 매장지가 어디인지 그 자체가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이 세상의 나그네로 본향을 그리워해야 하겠지요.

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따라서 매장이든 화장이든 자기 견해가 옳다고 우기면서 특정한 장례 운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조금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이 모든 일이 땅의 일이기 때문이지요! 다만 요셉이 아버지 야곱과의 약속을 지키려 한 것처럼 장례 방식이 신앙적 규례는 아니나 장례 문제에 있어 부모와 자녀 사이의 아름다운 약속은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살아생전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께서는 언론에 공개적으로 자신은 화장할 것이라 여러 번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측과 유가족 중 누구의 주장으로 매장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묘지 부족으로 시달리는 한반도 상황을 염려한 옥 목사님의 배려요 신학적으로 화장이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보여준 옥 목사의 깊은 생각을 교회는 깊이 생각했어야 합니다.

따라서 화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사후 화장을 하겠다고 (공적으로) 공언했던 옥 목사를 매장한 것은 교회가 생전 옥한흠 목사의 의도를 간과한 조금은 지혜롭지 못한 결정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경우를 헤아리지 못한 결정이었던 것이지요.

인생은 흙이요 잠간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합니다. 매장이든 화장이든 연연할 필요가 없으며 주님 안에서 신령한 부활을 소망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