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물결,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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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겪고 있는 짧고 가벼운 환난이 우리를 위해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의 영원한 무게를 얻게 한다(고후 4:17).”

오늘 마지막으로 사도의 이 말씀을 묵상해 보자. 영광의 영원한 무게를 고난과 함께 같은 저울에 달 수 있는가?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절대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영원한 행복은 큰 무게가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눈곱만한 부분도 크고 영원한 무게이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저 사도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환란은 일시적인 것이고 이 환난 자체가 짧고 가볍지만 영원한 무게를 얻게 한다. 그러나 그 경우, 영원한 행복은 지나치게 무거울 뿐 아니라, 그 관계는 두 개의 크기를 같이 달 수 없을 만큼 무겁다는 데 본질이 있다.

우리가 이것을 각각 이해해 보자. 1g의 금과 1g의 깃털은 같은 무게이다. 이것은 확실히 맞다. 그러나 그때 다른 의미에서, 더 중요한 의미에서, 이 두 개의 크기를 함께 무게를 달지 않는다.

왜 안 되는가? 왜냐하면 저울은 1g은 금이고 다른 1g은 깃털들이라고 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금은 금과 깃털을 함께 무게를 재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특별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두 개의 크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차이는 행복과 고난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 고난 사이에 존재한다.

그 관계는 이런 잘못된 관계에 있다. 그 관계가 잘못된 관계라는 것은 이것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 즉, 일시적 행복과 영원한 행복 사이의 관계다. 일시적 행복은 영원한 행복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그것 역시 일시적 고난과 동일하다는 것.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 고난과의 관계는 금과 깃털과의 관계만큼이나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질적일 뿐 아니라, 무한히 본질적 의미에서 이질적이다. 영원한 행복의 눈곱만한 부분도 가장 긴 세상적 고난보다 더욱 무한히 무게가 나간다. 이 표현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이 큰 기쁨이여!

고난당하는 자가 충분히 이것을 이해하게 하소서. 이것을 믿게 하소서. 일시적 고난이 가장 무거울 때에도, 영원한 행복이 여전히 지나치게 무겁다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고난당하는 자가 올바르게 무게를 달게 하소서. 무게를 더 잘 달게 하소서.

그래서 고난의 무게 아래에서 붕괴되는 대신에 영원한 행복의 무게 아래에 푹 잠기게 하소서. 이 영원의 예감에서, 말하자면, 이 균형을 박살내고 “여기에 무게를 달만한 어떤 질문도 있을 수 없다!”라는 말을 하게 하소서.

그러나 그와 같이 고난당하는 자를 발견하는 것이 이 시대에 얼마나 보기 드문가! 세상에서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행복이 지나치게 무겁다는 것을 쉽게 무시할 정도로 살아가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행복이 시간적인 것과는 이질적인 크기라는 것을 무시할 정도로 살아가는가. 다시 말해, 그들은 이 생각을 중지된 상태로 남겨둔다. 이 생각이 그 가치를 나타내게 할 뿐이다.

그들은 영원한 행복과 그들 자신과 관계하지 못한다. 영원한 행복은 그들의 삶의 일시적인 목표들과는 이질적인 것이 되었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행복해질 것이라는 무딘 착각 속에 살아간다.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교회에서 선포하는 복음은 더 이상 영원한 행복과 관계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해 복음을 이용함으로써 복음은 일시적인 행복에 봉사하는 종이 되고 말았다. 영원한 행복을 설교하는 것은 김빠진 사이다와 같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위험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상대적 위험과 절대적 위험으로 말하고 싶다. 상대적 위험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보험을 들면 된다. 때로는 저축을 할 수도 있다.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런 지혜는 일시적 행복과 관계할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복음이 이런 일시적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쓰임 받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보험을 하나 더 들라!

하지만 절대적 위험도 있다. 이 위험은 아무나 발견할 수 있는 위험이 아니다. 이 위험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른다(살전 5:2)”는 그런 밤이다. 보험을 든다 해서, 저축을 한다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런 위험이 아니다.

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것을 생각해 보라. 어떻게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용감했는가? 사도바울은 어떻게 평생의 위험을 일시적 고난이라고 말했는가?

어떻게 그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는가(히 11:36-37)? 한 마디로, 왜 그들은 보험들 들고 안락한 삶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절대적 위험을 발견한 것 말고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또한 영원한 행복을 발견한 것 말고 다른 것이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가 입술로만 영원한 행복을 말하지 실질적으로는 일시적 행복만을 위해 복음을 이용한다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이 세대는 영원한 행복을 존중하지 않았다. 이 세대는 도둑같이 이를 수 있는 밤을 준비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형벌을 피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성서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는가!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할 수 있겠는가(히브리서 2:3)!”

그러나 심판을 통과하는 것이 오늘 의도하는 바는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 판단하기를 바랄 뿐이다. ‘고난의 복음’을 선포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믿는 자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때, 어떤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있는지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 고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기술, 이 측량 불가능한 기쁨, 바로 이 기술이, 이 기쁨이 믿음의 기적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