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윤
▲허정윤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1. 하늘과 땅

창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ויכלו השמים והארץ וכל צבאם׃ [바예클루 하샤마임 베하아레츠 베콜 체바암]. 모세는 하나님이 6일 동안에 하늘과 땅, 그리고 만물의 창조를 완성하신 것으로 선포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창 1:1의 천지창조 선포에 만물이 추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천지만물이 창조자 하나님에 의해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의 각 단계에서 천지만물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 논의하려고 한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방법은 명령하는 말씀뿐이었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하나님을 개입시키지 않고 과학적 이론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성경해석과 과학적 이론을 적절히 인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고대 히브리인들을 상대로 설명했던 모세의 창조론을 '문자 그대로' 답습하는 방법으로는 현대인들에게 기독교의 창조론을 납득시킬 수가 없고, 과학적 이론만으로는 기독교 창조론과 연결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못된 성경해석과 과학이론에 대해서는 비판도 해야 한다.

그동안 기독교는 성경의 무오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문자 그대로'의 해석에 집착하다보니, 고대인의 지식과 그들이 썼던 문자의 의미가 현대에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창세기는 특히 그렇다. 문헌을 읽는 독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독자의 수준에서 그 문헌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그것은 그 문헌의 해석을 듣거나 읽음으로써 이해하는 청자(聽者) 또는 2차 문헌의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현대인들을 상대로 고대 히브리인들의 수준에서 쓴 모세의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라고 강요하면, 현대인들이 배척할 것은 뻔한 일이다. 왜냐하면 모세의 창조론은 이제 중학교 과학책에서도 부정되는 수준으로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창조과학적 창조론은 아직까지 모세의 창조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창조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기독교의 창조교리를 변증한다고 강변하면서 현대인들의 지식수준이 고대 히브리인들의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늘날 기독교의 창조론이 모세의 창조론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학생들마저 기독교를 버리거나 신앙에 변질이 오고 만다.

국내에서 그 대표적인 사례가 『종교전쟁』을 쓴 3인의 저자들이다. 한 사람은 KAIST에 다닐 때, 창조과학적 창조론 세미나에서 참석했다가 기독교를 버리고 무신론자로 서울대 교수가 되었고, 두 번째 사람은 신학대 교수이면서 다윈주의자가 되었고, 세 번째 사람 역시 신학대 교수이면서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이와 같이 현대 기독교에서 모세의 창조론을 '문자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기독교 창조론을 신화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면서 젊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게 하거나 신앙을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성경은 책을 구성하는 종이와 문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어떻게 합당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가르친 토라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의 예언을 기록한 요한계시록까지, 전체적 의미의 흐름을 먼저 이해하는 관점에서 읽어야 올바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책이다.

창세기는 모세가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이 천지만물의 창조자이시니, 그분만을 신으로 믿고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가르쳤던 책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창세기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창조자 하나님을 버렸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에게(사 65:2)는 보응하여 죽이고, 택한 백성을 위해서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할 것(사 65:17-18)이라고 예언하셨다.

신약성경은 그 예언을 성취하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복음을 선포했으나, 유대인들에 의해 오히려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고발되어 결국 로마제국의 반역자로 처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속히 다시 오셔야 한다. 하나님은 그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석 제자 베드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는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권고했다(벧후 3:12-13, 3:18).

예수 그리스도의 애제자 요한은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을 창조하시고, 처음 하늘과 처음 하늘이 없어진다고 예언했다(계 21:1). 성경에서 이와 같이 예언된 사실은 창세기만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없어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바로 모세가 창세기에서 서술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없어질 옛 하늘과 옛 땅을 바라보고 있으면,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겠는가? 만약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나님이 굳이 그것들을 새로 창조하실 이유도,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백성들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신다.  

기독교인들이 모세의 옛 창조론을 버리려면, 그것의 오류를 분명히 깨달아야 될 것이다. 오류의 핵심은 앞에 쓴 칼럼들에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그림'과 함께 설명했던 '라키아'(궁창)이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은 둘째 날에 땅을 덮고 있는 물 가운데에 '라키아'를 만드시고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 그리고 위의 물과 함께 들어 올려진 '라키아'를 하늘이라고 했다. 그 하늘이 옛 하늘이다.

모세의 창조론은 하나님이 옛 하늘 밑에 있는 땅에 생태계와 생물을 창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세의 서술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의 인식 방법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듣고 그 실현 과정을 맨 눈으로 관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 모세가 광대한 하늘과 땅의 창조를 맨눈으로 보면서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하나님도 모세에게 굳이 세세하게 가르쳐주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세의 창세기 서술에는 모순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도 모세의 서술에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신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물을 내게 한 사건(민 20:8)과는 달리 모세를 질책하지 않으셨다. 당시에 하나님의 목적은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창조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사야와 사도들을 통해 모세가 서술한 '라키아'의 하늘과는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예언하게 하시고, 기다리셨다. 때가 되면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귀 있는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깨달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가진 그의 백성들이 생겨나면, 예언하신 대로 그들을 위해 새 창조를 시작하실 것이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가지려면 과학을 부정하는 관점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을 인정하는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과학은 사실상 창조자 하나님의 창조명령이 실현되는 과정을 자세히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현대과학은 우주탐사선까지 쏘아 올려서 하늘과 땅의 구조와 형성과정을 탐구하였고, 이제는 매우 설득력 있는 현대 우주론을 제안하고 있다.

현대 우주론의 관점에서 보면, 하늘은 모든 우주물체 사이의 빈 공간을 의미한다. 우주의 빈 공간은 우주물체들의 위치가 정해지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므로 우주물체와 따로 창조되지 않았다. 우주공간은 우주물체들의 중력과 전자기파 등의 에너지가 통행하는 곳이고, 인간들의 비행기구와 우주탐사선의 통로로도 쓰이는 곳이다.

이제 현대 우주론은 현대인들에게 과학상식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모세의 관점에서는 하늘이 '라키아'이고, 그 위에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주한다. 여기에 복음적 관점을 더하면, 하늘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기 전에 계시던 곳이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 후 승천하여 계신 곳이다.

또한 하늘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통로가 되기도 할 것이다. 모세가 서술한 '라키아'의 하늘에는 그 위의 존재들이 통로로 이용하거나 그 위의 물이 비가 되어 내리는 문이 있다. 그러나 우주공간 어디에서도 그런 구조의 '라키아'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라키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결론 지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천사들의 거주지도 우리우주에서 탐색하지 못했다. 그곳은 우리우주의 아주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초월적 존재인 그들의 거주지는 열역학 제1법칙에 의하여 입증되는,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는 에너지 우주에 있다고 추정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아주 먼 곳에 거주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 거주하는 인간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현재 이 질문에 과학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현상이다. 이것은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을 '멀리 있는 도깨비가 조종하는 것 같은 허튼 소리'라고 조롱하면서 벌어진 'EPR 논쟁'(1935)의 과정에서 제기된 개념이다.

이것을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가 '양자 얽힘'이라고 부르고, 닐스 보어(Niels Bohr)가 반론하면서 유명해졌다. 그러나 '양자 얽힘'이 과학이론으로 발표된 것은 1964년 아일랜드의 물리학자 존 스튜어트 벨(John Stewart Bell)에 의해서였다. 그것은 한 번 짝을 이뤘던 두 입자들이 '아무리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느 한 쪽이 변동하면 그에 따라 다른 한 쪽이 '즉각' 반응하는 불가사의한 특성을 보이는 현상이다.

여러 차례의 지상 실험에 성공하자 2016년에 중국은 양자통신위성 묵자(墨子)호를 발사하여 '양자 얽힘'으로 원거리 양자통신 기술을 실험하고 있다. 최근에 서방에서는 '양자 얽힘'에 '양자중첩'(quantum superposition)이라는 현상을 접목하여 네트워킹 실험에도 성공했다.

이런 사실에서 보면, SF 영화 등에 많이 등장하는 텔레파시(telepathy)는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었고, 물질의 최소 단위인 양자 차원에서 순간이동(teleportation)도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창조자 하나님이 거주지에서 지구까지 순식간에 왕래하거나 소통하는 방법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이해된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인간의 거주 가능성도 납득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소망하는 사람들은 '라키아'가 있는 모세의 옛 하늘과 옛 땅을 즉시 버려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창조과학적 창조론자들은 고대 히브리인 모세가 서술한 '라키아'의 하늘이 사실이라고 강변하고, 첨단 과학 데이터에 기초하여 일반적 상식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현대 우주론을 부정하고 있다. 이런 행동은 아직도 천동설이 맞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성경해석은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는 관점이 필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창조과학적 창조론은 창세기 일부분만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세가 서술한 옛 하늘과 옛 땅을 버리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모세의 모순적 창조론을 답습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실현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건설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은 왕국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옛 하늘과 옛 땅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여, 주여'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는 기독교인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계속)

허정윤(Ph. D. 역사신학, 케리그마신학연구원, djtelcom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