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양팔 저울로 무게를 달기 위해서는 두 개의 비교 대상이 필요하다. 곧 다른 사람의 성공과 자신의 성공, 다른 사람의 재산과 자기 재산, 다른 사람이 가진 재능과 자신의 재능과 같은 요소들을 비교하며 무게를 달아보는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비교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시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의 무게를 달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일시적인 것들의 무게를 달아보기 위해 애쓰는 자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일시적인 것들과 영원한 것의 무게를 다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본문 말씀을 나누고 이야기를 전개시켜 보자.

“우리가 겪고 있는 짧고 가벼운 환난이 우리를 위해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의 영원한 무게를 얻게 한다(고후 4:17).”

곧 환난이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의 영원한 무게를 얻게 한다. 이것은 결국 환난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환난이나 고난은 우리를 파괴하거나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영광의 영원한 무게를 얻게 하는 전달자인 셈이다. 바로 이것이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저울에 달아보려는 이유다.

일시적 고난이 사람에게 가장 소름끼치게 무거울 때는 언제인가?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도 없고, 어떤 것도 구하지 못하고, 어떤 것도 획득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아닌가?

곧 사람이 고난당하는 중에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 고난은 더욱 무거워진다. 이렇게 고난당할 때, 일시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을 비교하는 것, 다른 사람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을 비교하여 저울에 다는 것은 거의 저주에 가깝다.

하지만 시합에 참여하려는 자가 준비하는 데 너무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 해서 불평하는가? 시합 전에 얼마나 많은 고된 훈련과 고통에 시달리는가? 너무 많은 고난과 고통에 휘말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가 불평하는가?

그는 왜 불평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가 향방 없이 달릴지라도, 이 고난이 그를 위해 승리의 상급을 가져다 줄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노력이 가장 크고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는 상급에 대한 생각으로 자신을 격려한다. 이 특별한 고난이 그를 위해 상급을 얻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자신을 격려한다(빌 3:14).

그리하여 그가 자신이 생계, 혹은 명예, 부, 사랑의 보상, 혹은 우리가 언급하고 싶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해할 때, 그는 수많은 고난을 견디지 않는가!

라라랜드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개인의 참된 행복을 꿈꾸는 장면 속 세바스찬과 미아(본 사진은 해당 칼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요점은 이런 이해가 일시적이라는 데 있다. 혹은 적어도 그가 이것을 아주 잘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고난이 자신을 위해 그가 탐내는 것들을 가져다 줄 것이라 이해하거나 그렇게 생각한다.

아, 하지만 그가 탐내는 것, 그것은 측량 불가능한 영광의 크고 영원한 무게보다 무한히 열등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이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4-25)”.

만약 영원의 무게를 달지 않는다면, 그래서 여전히 고난이 수수께끼이고, 고난의 어떤 목적도, 어떤 이유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고난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하나님을 저주하고 결국 믿음을 버리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영원한 행복은 지나치게 무거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한 행복을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영원한 것을 무게를 단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고난당하는 자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다면, 다시 말해 고난이 영광의 크고 영원한 무게를 얻게 해줄 것이라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때 영원한 행복은 지나치게 무겁다. 그때 고난당하는 자는 고난을 견딜 뿐만 아니라 영원한 행복이 지나치게 무겁다는 것을 이해한다.

고난이 무언가를 얻게 해줄 것이라고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통찰은 ‘시간의 인내’를 얻게 해준다. 그러나 이해와는 반대로, 고난이 완전히 사악하고 쓸모없는 것처럼 보는 반면, 영광의 크고 영원한 무게를 얻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영원의 인내’를 가져다준다.

사람들은 안전을 원한다. 일반적으로는 확률에 기반을 둔 안전이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안전은 일시적인 안전에 불과하다.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다면, 두려워 떨 것이다.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다면, 놀이동산에서 아무리 즐거운 놀이기구도 두려워서 탈 수 없을 것이다. 목숨 걸고 타는 놀이기구가 즐거울 리 없다.

하지만 가장 무거운 고난이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의 크고 영원한 무게를 얻게 해줄 것이라 기꺼이 믿기 원하는 안전이 있다. 따라서 심지어 일시적인 고난이 가장 무거울 때도, 영원한 행복은 여전히 지나치게 무겁다.

마지막으로 이것만은 명심하자. 영원한 행복에 대하여, 우리가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고난이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한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어야 하니까.

그때 그것은 누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경우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분명히 영원한 행복에 대한 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행복은 믿는 것 외에는 길이 없으니까. 바로 그런 이유로 이것은 누릴만한 자격도 있을 수 없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