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믿음으로 의를 전가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는 인류가 아담의 죄를 유전받았다는 ‘원죄(原罪) 교리’와 불가분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이 자기가 아닌 원죄자 아담으로부터 죄를 전가 받아 된 것임을 믿는 자는 자기의 의인됨이 자기가 아닌 원의자(原義者) 그리스도로부터 의를 전가 받아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아담에 의해 원죄가 전가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리스도에 의해 원의(原義, original righteousness)가 전가된다는 것을 못 믿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누가 이신칭의를 거부한다면, 그 뿌리에는 원죄 교리의 부정이 자리합니다. 그들은 아담을 원죄자(原義者)로 삼는 ‘원죄’교리를 부정하고 인간의 죄인 됨을 오직 ‘자기 죄(self-sin)’에 의존시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원의자(原義者)로 삼는 ‘이신칭의’를 부정하고 인간의 의인됨을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의존시킵니다. 이처럼 ‘원죄’와 ‘이신칭의’의 부정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입니다.

아담의 ‘원죄 유전(遺傳)’를 부정한 4세기의 반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가 ‘의의 전가(Imputation of Righteousness)’를 가르치는 이신칭의를 거부하고 신인 협력주의(synergism)를 주창했던 것은 당연합니다.

논의를 더 진전시킨다면, 인류는 자기가 죄인 되는데 보탠 것이 없습니다. 그는 단지 원죄(原罪)를 유전받아 죄인이 됐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택자가 의인 되는데도 그가 보탠 것이 없습니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의 원의(原義)를 전가(轉嫁) 받아 의인이 됐을 뿐입니다.

인간의 죄인됨의 시발은 개인의 자범죄 때문이 아닙니다. 인류의 죄인되고 의인됨은 두 머리, ‘아담’과 ‘그리스도’에 의해 결정됐습니다. 곧 ‘아담’에 의해 죄인이 됐고 ‘그리스도’에 의해 의인이 됐습니다.

다음은 그것을 지지해 주는 성경 구절들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롬 5:18)”.

성경은 '인간의 죄인됨과 율법의 연관성'을 제시하며 우리를 더 힘있게 설득합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롬 5:14)”.

‘아담 이후의 사람들과 모세의 율법을 부여받기 전 사람들까지’ 곧 아담 이후 모세까지 율법을 범하지 아니한 자들에게도 아담의 원죄가 지배하여, 그들에게 죄인됨과 사망을 선고했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성문법인 율법의 범법 없이 오직 아담의 원죄에 참여하므로 죄인이 됐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죄인이 의인되는 데도 아무 보탠 것 없이 오직 원의자(原義者)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 됐다 고 성경은 말합니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성도가 의(義)를 행하는 것은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원의에 참여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원의자(原義者)가 무죄하신 하나님아들이어야 함은 원죄가 무죄자 아담이 지은 죄이기에, 무죄자 하나님 아들만이 택자의 원죄를 속할 수 있는 자격자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무죄자 아담이 범한 원죄를 해결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담보다 크신 그리스도

전가받은 그리스도의 원의(原義)가 우리 죄를 사하고 우리를 의롭다 해줄 수 있음은, 그의 원의가 아담의 원죄(原罪)보다 더 크고 완전한 ‘하나님의 의(義)’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원의가 아담의 원죄보다 크지 않다면, 결코 그의 의가 택자를 아담의 원죄에서 건져낼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인류가 타락하게 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의(義)가 인류의 많은 범죄를 의롭게 하는 데는 더 큰 공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롬 5:15-16).”

뿐만 아니라 뒤의 ‘원의(原義)’로 앞의 ‘원죄(原罪)’를 해결하려면 원의가 원죄에까지 소급(遡及)해야 하는데, 그러한 소급은 원의자(原義者)가 원죄자(原罪者)보다 앞설 때만 가능하며, 그럴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요 1:30;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요 1:30)”.

영적 원리에 자연법을 적용하는 것은 어색해 보이지만, ‘위에서 아래로 낙하하는’ 중력(重力)의 법칙대로라면, 하향적(下向的)인 ‘원죄의 유전’에는 큰 에너지가 필요 없습니다.

반면 중력을 거스리는 상향적(上向的)인 ‘의(義)의 전가’에는 큰 에너지가 필요하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피만이 택자의 원죄까지 소급해 속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양의 가죽옷을 입혀주신 것은(창 3:21) 오랜 후 오실 그리스도가 소급하여 택자의 원죄를 속량 할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비록 2천년 전이라는 ‘시간’과 팔레스틴(Palestine)이라는 ‘공간’ 속에 육체를 입고 오셨지만, 그는 시공간에 갇힐 수 없는 ‘전 시간(whole time)’ ‘전 공간(whole space)’에 편만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영원 무한자’가 시공간의 한 지점(a spot)에 잠시 연루된 것일 뿐, 결코 그 시공간 속에 갇힐 수 없었습니다. 그가 흘린 영원한 피는 ‘과거로는’ 인류 시조 아담의 원죄로까지 소급하여 경륜할 수 있고, ‘미래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지의 택자의 죄 까지 미칠 수 있습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벧전 1:20)”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창세 전부터 말세까지’ 다 아우르실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원의(原義)가 전가해 준 의(義)는 아담이 범죄 하기 전의 상실(喪失)가능한 의(義)의 상태로 돌려놓은 것이 아닌, 다시는 상실불가한 완전한 의(義)의 부여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피는 원죄와 자범죄를 능히 씻고도 남을뿐더러, 그것이 갖다 준 원의(原義)는 영원합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히 온전케 된 성도는 다시는 그 의를 잃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죄의 핵심은 원죄

심판의 핵심 내용이 ‘둘째 사망(계 2:11, 20:6)’ 곧 지옥인데, 이 둘째 사망을 야기한 죄는 원죄(原罪, Original sin)와 자범죄(自犯罪, actual sin)입니다.

그런데 이단으로 정죄된 ‘S교회 김모 목사’라는 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인류의 원죄를 해결해 주었기에, 불신자든 신자든 원죄 때문에 심판받는 일은 없고, 오직 개개인의 자범죄(自犯罪, actual sin)로 지옥에 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핵심 내용을 ‘원죄’로 본 것은 맞지만, 그것이 믿지 않는 자의 원죄(原罪)까지 없이할 수 있다고 한 것이나, 지옥 갈 죄를 자범죄(自犯罪)로 한정지은 것은 명백히 이단입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모든 인류의 원죄는 다 사해졌기에, 사함 받아야 할 죄는 오직 개인의 ‘자범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은 ‘원죄’ ‘자범죄’를 다 포괄했습니다.

‘믿는 자의 죄가 용서받는다(행 10:43)’ 는 것은 원죄, 자범죄를 다 포괄한 것이지(렘 14:20, 골 2:13) 어느 하나만을 특정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원죄(原罪)를 사함 받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는 ‘원죄’가 도외시 된 채 개인의 도덕적인 죄에만 관심을 갖는 세상 사람들이나 계몽주의 기독교인들의 죄개념 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첫 언약 때에 범한 죄’ 곧 ‘원죄’를 속하려고 죽었다고 한 것은 그의 속죄가 원죄를 우선시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라 하신 것도 그가 ‘아담의 원죄’를 해결하러 오셨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원죄는 죄의 뿌리이고, 자범죄는 원죄의 드러난 현상이고 열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선시해야 하는 속죄의 내용은 당연히 '원죄'입니다. 원죄를 그냥 두고 자범죄를 해결하려는 것은 구데기와 악취만 없애고 그것의 원천인 거름더미는 없애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원의(原義)를 전가받아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담의 원죄를 유전받아 죄인 되는 원리와 동일합니다. ‘원죄 유전’을 믿는다면 ‘의의 전가(轉嫁)’도 당연히 믿을 수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대표성 원리(롬 5:12)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인 됨이 보탠 것 없이 단지 원죄자에게서 태어남으로 됐듯이, 인간의 의인됨도 아무 보탠 것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되도록 하나님이 경륜하셨습니다.

그것의 신학적인 서술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