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기독교인들이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나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National Park)’ 같은 거대한 자연을 대면할 때,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당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진다’ 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심지어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들까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영음을 듣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또 어떤 설교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땅이 그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라는 본문을 설교할 때 ‘저 광활한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지 않습니까? 어찌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눈이 밝아 공해와 미세먼지로 뒤덮인 잿빛 창공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가!’ 라는 비아냥이 생겨나면서, 그의 신학 소양까지 의심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에 대한 두 가지 의구심이 든다. 그들은 자연계시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사상 체계를 가졌는가? 아니면 나무, 새, 물고기들에게 설교했다는 성 프란시스(Saint Francis) 같은 자연신비주의(nature-mysticism)자인가? 하는 생각이다.

더불어 한 가지 우려도 생겨난다. 자연에서 그런 영적 감흥을 받지 못하는 이들로 하여금 ‘나는 뭔가, 저들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수준을 지녔구나’라는 왜곡된 ‘하이어라르키즘(Hierarchism, 영적 영적 계급주의)’에 빠뜨려지게 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을 칭송하려는 순수한 의도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자연에 대한 무분별한 칭송이 그 의도와는 달리 부지불식간에 듣는 이들로 하여금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나 ‘뉴에이지(New Age)’를 승인하게 만들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자연계시의 목적은 구원이 아닌 심판

사도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를 주신 목적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불택자들을 심판하실 때 그들로 핑계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19-20)”. 풀어 설명하면 ‘너희에게 자연만물을 통해 나를 계시했지만 나를 알지 못했으니 너희는 심판을 받아도 핑계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심판받는 불택자들을 핑계하지 못하게 할 뿐더러, 다른 한편 하나님이 불택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핑계를 제공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불택자들을 유기(遺棄)해야 하는데, 자신을 계시해 주지도 않고 하나님을 몰랐다고 유기하는 것이 비(非)공의롭다는 항의를 불식시키기 위해 자연계시를 주신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도 이를 지지한다. 곧 불택자에게 특별 계시를 봉인(封印)하고 자연계시만을 준 것은 그들을 유기(遺棄)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특별계시 봉인)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10).”

그리고 불택자에 대한 특별계시 봉인이 하나님 탓이 아닌 그들의 완악함 때문임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인간의 책임)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하나님의 유기작정) 하였으니(행 28:26-28).”

이는 ‘하나님의 계시봉인(啓示封印)’과 ‘인간의 완악함’은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과 ‘인간의 책임(responsibility of man)’이라는 신학적 문제로 귀결시킨다.

이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과연 심판받을 죄인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함을 벌 받을 죄로 말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이 따르리니(살후 1:8).”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자기의 존재 근원인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당연한 본분이기 때문이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사 1:3)”는 하나님의 탄식에서 보듯, 인간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껏 그 정도라면 그것 때문에 멸망에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살후 1:8)’이요 ‘하나님과 원수 됨(롬 5:10)’이다(‘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이요 ‘순종’이다).

‘하나님을 안다 모른다’는 ‘영벌(永罰)’과 ‘영생(永生)’을 결정짓는 ‘관계론적(Relational)이고 존재론적인(Ontologisch)’ 문제이다. 다음은 그러한 견해를 지지해 주는 구절들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이 따르리니(살후 1:8)”,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택자(擇者) 에게만 허락된 특별계시

기독교가 계시종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로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유기된 불택자(不擇者)들에게는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만 주어질 뿐, 특별계시는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특별계시를 통해서만 알려지게 하셨다. 이는 인간의 타락 후 만 아니라 타락 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타락 전에도 하나님은 오직 특별계시 ‘말씀(λόγος, logos)’에 의해서만 알려졌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성자 말씀(λόγος, logos)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함은 성자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을 계시해 주었다는 뜻이다.

성자 그리스도를 ‘말씀(요 1:1)’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계시(설명)해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타락 전에도 성자 말씀(λόγος)없이는 하나님이 충분히 알려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타락 후 성육신한 그리스도는 단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사람으로 나타나 하나님을 계시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성육신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대인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음에도, 그가 하나님인줄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사람들에게 완전한 하나님 계시를 갖다 주어 하나님을 알게 했다. 죄인이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아 그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은 죄의 담이 무너지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는 인간의 이성, 상식, 과학, 자연 현상 같은 자연계시에 호소하지 말고, 특별계시 곧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받는다.

특별계시를 세분하여 나누면, 객관적 계시(objective revelation)인 ‘그리스도’와 주관적 계시(subjective revelation)인 ‘중생’이다. 택자들에게 ‘그리스도’가 보내지고,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중생(regeneration)’의 은혜가 입혀지므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객관적 계시’인 그리스도를 보아도 ‘주관적 계시’인 중생을 받지 못하면 그리스도도 무용지물이다. 그리스도를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마 13:13)’ 공개된 비밀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주실 때’(고후4:6)”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이 모든 사실들에서 기독교의 구원은 명실공히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임을 알게 된다. 곧 ‘성부 하나님의 구원 예정’과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조명’으로 된다. 삼위 하나님께 영광.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