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첫째,  하나님의 이름(여호와)을 알려주신 사랑(창 2:4)

1) 창조시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이었다. 엘로힘은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신의 이름이다(=신의 이름 엘). 이스라'엘', 벧'엘', 임마누'엘'의 '엘'이 바로 '신'이다. 바'알', '알'라와 같은 이방신도 '알'('엘')이다.

2)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알릴 때에는 여호와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성경에 여호와는 모두 6823번 나타난다. 이때 여호와라는 이름은 모두 정확하게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쓰였다. '엘'은 평범한 이름이다. 세상에 아버지는 많으나 아무나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나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우리와 친히 관계를 맺으시는 여호와로 나타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로 처음 나타나셨다. 여호와는 거룩한 이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름(발음)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였다. 여호와라는 명칭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였다. 괜히 송구스러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쓰고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우리 성경에 '주님'으로 번역된 그 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먼저 들어내신 분이다. 부모도 아기에게 맨 먼저 아빠, 엄마부터 말을 가르친다.

사람들은 자신과 수준이 안 맞으면 속으로 '넌 알 필요도 없어'하며 무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먼저 오픈하셨다.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먼저 사랑'이 사람이 범죄 한 이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이유가 되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라 했다. 즉 창세기 2장 4절의 '여호와 하나님'(=아도나이 하나님) 즉 '주님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나의 주님이 바로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둘째, 사람을 위해 동산을 배려하신 사랑(창2:5-6)

하나님은 낙원을 주시는데 그것은 사람을 위한 준비였다. 사람이 없을 때에 동산은 아직 초목과 채소가 없었다. 사람이 있을 때에 이런 것들은 의미가 있다! 주인공이 있어야 케익이나 꽃이 의미가 있다. 주인공 없이 꽃다발을 들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만드시고 자신이 만드신 동산으로 사람을 데려가셨다. 들의 초목이나 밭의 채소는 1장에기록된 풀과 씨 맺는 채소나 열매 맺는 과목과는 다르다. 2장의 이 말은 땅을 일구고 수고해야 먹을 수 있는 곡물이나 떨기나무, 관목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이런 것들을 두지 않았다.

이 말씀은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인간 타락 이전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일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열매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천국의 모습은 지금과 다를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천국은 상상할 수 없는 곳이다. 그저 다르다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다. 타락하여 무너진 세상에 살면서 천국을 가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상상으로 바라볼 뿐이다. 천국 간증은 상상이다. 즉 거짓이다. 상상은 자신 만이 간직해야 된다. 남에게 퍼뜨릴 때 문제가 발생한다. 천국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보고 싶다면 말씀 안에서 타락 이전의 이 에덴동산을 보고 상상해보라! 성경은 타락된 지금 세상과 조금 다른 에덴동산을 살짝 알려준다.

셋째,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지으셨음을 알려주신 사랑(창 2:7)

사람은 본래 흙이었다. 흙이 가진 17가진 주요 성분이 사람 몸에도 그대로 있다. 사람도 다른 생명처럼 육체이다. 육체로는 다른 생물과 별 다를 것이 없다. 생령이 아닌 죽은 육체는 그래서 구루터기나 다름없다. 그저 썪어서 흙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빚어 지으셨다(히브리어 '야차르'). '야차르'는 토기장이가 흙으로 무엇을 만들 때 쓰는 단어이다. 토기장이는 의미 없이 아무렇게나 질그릇이나 토기를 만들지 않는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특별한 목적! 예술가가 아무렇게나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란 성경에 보면 첫째 인간의 찬양을 받기 위함이요(사43:21)이요, 둘째 하나님은 야곱을 '야차르'하였기에 잊지 않겠다(사44:21)했고, 심지어 복 중에 '야차르'하기 전에 예레미야를 알았다(사랑했다) 했다. 하나님이 알면 하나님이 사랑한 것(렘1:5)이다. 하나님은 '나는 아이라 말할 줄 모른다'고 변명하는 예레미야를 안다(사랑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명도 '야차르'(시139:16)하였고 악인도 '야차르'(왕하19:25)하였다. 하나님이 성도를 '야차르'하였다. 가정을 '야차르'하였고, 교회를 '야차르'하였다. 선한 목적의 '야차르'였다. 하나님은 선한 것은 선한 뜻에 맞게, 악한 것은 악한 것에 맞게 '야차르'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한 목적이 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여러분 가정 교회를 주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선한 '야차르'를 믿는 다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넷째, 사람의 주거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창 2장 8-14절)

에덴동산은 '기쁨의 장소'라는 뜻이다. 즉 참기쁜 곳이라는 뜻이다. 그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위치가 중요하지 않다. 인류가 죄 지은 이후로 에덴은 사라졌다. 이제 에덴은 지역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만 회복된다. 참기쁨은 예수 안에 있다. 15 가지 지리적인 언급 가운데 14 가지가 현재시제이다(지금 거기 있다는 뜻). 과거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지금거기 있는 것이다. 두 강은 지금도 있다. 따라서 에덴의 과거 위치를 일부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무너진 실락원을 지금 굳이 찾아본 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섯째,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 사랑임을 알리심(창 2: 15-17절)

하나님 사랑은 무절제한 사랑이 아니다. 관계된 사랑이다. 아무런 언약이 없는 하룻밤 사랑이 아니라 질서가 있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로 표현하고 있다. 15절서 8절을 반복하신 이유는 중요하다는 의미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선악의 구별을 아는 유일한 생명체다. 그래서 인간에게만 죄라는 개념이 있다. 에덴동산에 언약의 징표를 두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사랑은 무분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깨져버리면 생명도 깨진다. 단순 연애와 부부의 차이(무분별과 언약의 차이)를 구별하라. 쥐새끼가 고구마 훔쳐 먹고 죄책감을 가지는가? 강아지가 사람 물고 죄책감을 가지는가? 강아지는 또 문다.

행복은 믿음과 순종에서 온다!

우리를 빚으신('야차르'하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요 복이요 완전한 행복, 완전한 평화, 완전한 사랑을 체험하는 길이다. 일방적 사랑이 열매를 맺으려면 그 사랑을 상대방이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짝사랑하신다!

그 사랑이 맺어지려면 간단하다.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간단한 것을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귀하고 값지고 짜릿한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의 짜릿한 사랑은 즐기면서 하나님과별거하려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누구 때문인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바로 그 존재, 사단이다! 하지만 누가 그 사랑을 끊으리요. 하나님 본체가 사랑이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호 1장 23-2장 1절/14장 4절)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사랑하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 사랑을 외면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게 세상의 쾌락이 달콤한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동물만도 못하다. 아니 못한게 아니라 추악하고 패역하다. 고릴라는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귀의 유혹으로 타락한 사람은 마귀처럼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고릴라보다 더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부모 빰을 치거나 방망이로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은 극형에 처한다. 패역한 자식이기 때문이다!

원숭이보다도 고릴라보다도 못나게 살아갈 것인가? 값진 사랑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부르셨다.

여기 성경의 결론을 보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랑하시는 예수 안에서 거져 주셨다'(엡 1:4)!

이 비밀한 사랑을 알아야 사랑은 완성 되는 것이다!

조덕영 목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