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지난 봄 부활절연합예배 모습(사진은 해당 기사와 관련 없습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예배가 신앙의 핵심인가? 한마디로 답하라고 하면 “그렇다”, 두 마디로 말하라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주일성수를 외치던 때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주일은 “내 날이 아니고 주의 날”이다. 그래서 예배가 생명이고, 신앙의 능력이다. 예배해야 산다. 이런 배경에서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벌받을 것이다. 주일날 여행을 가면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다.”

이런 설교를 수십 년 들어온, 그래서 한국의 성도들은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벌받을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어떤 사람은 주일을 안 지키 자니 벌받을까 두려움도 있고 해서 주일 오전 1부예배에 잠깐 참석하고 볼일을 보러 가든지, 여행을 가든지 하는 경우가 많다.

주일성수, 자연히 예배가 핵심이다. 그런데 정말 예배가 능력이고, 생명이고, 치유가 일어나는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침은 모두가 예배를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는 신앙과 기대에 부응하여,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그렇게 외쳤기 때문이라고 본다. 결국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중심의 예배로 끌어내린 것 말이다.

한국에 어떤 목회자 성경연구 모임을 인도하는 강사가 모스크바에 와서 강의를 했다. 말씀에 대한 갈망과 함께,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필자도 참여하였다.

성경을 구조적으로 전체 그림을 그려서 맥을 집어주는 것이 매우 좋았다. 그러한 방법으로 연구를 하기에 매우 많은 수고와 노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필자도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으기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강의 중 예배에 대한 강조를 하는 것은 좋았지만, 주일성수와 예배가 생명이라고, 신앙의 핵심이고 능력이고 치유가 나타난다는 강조로 마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드려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가? 너무 추상적이지 않는가? 좀더 이야기를 해보자. 성경 어디에 예배가 생명이라고, 능력이라고, 승리의 비결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성막 시대에 제사 행위는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며 모든 우상을 배격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을 강조한 예배였다고 본다. 애굽에서 400여년을 하나님을 잊어버린 세대에게 합당하고 당연한 강조인 것이다. 성막 시대를 지나서 성전에서 예배하는 시대가 도달하여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이고 경배한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 포로 시대로 들어간다. 예배할 곳이 없고, 가나안을 꿈꾸던 백성들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흩어지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 포로 된 그 백성들을 향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를 비롯한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외치기를, “너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로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왔다고 말한다.

포로 된 것도 분하고 억울한 상황인데, 너희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책망하지 않는가? 본토에 남아있는 백성들을 향하여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로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급기야 말라기 선지자는 1장에서 “너희들의 예배를 내가 싫어하고 짜증이 난다”고 말하고 있다. “내 성전들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버리고 싶다. 즉 너희들의 형식적인 예배, 지겹고 보기도 싫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의 얼굴에 똥을 발라서 처리”하고 싶을 정도라고 매우 강한 어조로 폭탄선언을 하고 있다.

신약으로 이어지는 예배에 대한 생각, 주님도 강한 어조로 바리새인들의 예배를 비판하고 있다. 예배가 “생명”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에게 “화”로 돌아가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형식적인 예배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없는, 그리스도가 빠져버린, 껍데기만 남은 생명력이 없는 예배였기 때문이었다.

한국교회는 예배를 강조하고 거룩하게 드리라고 외친다. 아마도 그것은 목사가 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설교를 들으라고 권면하는 것이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하도록 강조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자. 기계처럼 정확하게 1시간 만에 모든 것이 돌아가는 조직적인 대부분 한국교회 예배의 모습, 예배를 강조하고 주일성수를 외친 결과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떻게 되었는가? 대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1. 성도들의 신앙이 예배당 안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예배당 안에서만 열심을 낸다. 성경공부 모임, 기도회 모임, 성도들끼리 서로 봉사하고 섬기고 희생을 강조한다.

“할렐루야” 교회 안에서만 거룩한 것처럼 신앙의 모습을 표출한다. 방콕 신앙인,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아닌가? 세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이 아니기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2. 세상과 교회를 구분시켜 버렸다. 이원론적인 신앙인을 대량 생산해낸 것이다. 그래서 한국 보수주의는 대부분 세상 일에 무관심하고 세속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것이 신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죄에 물들지 않고 자기를 지키는 길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교회의 일에만 관여하면서 살려고 하다 보니, 세상을 송두리째 세속에 내어 주게 되고 세상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며, 양심의 가책과 시대적 책임 없이 은혜 속에(?) 머무는 ‘불의’를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3. 나아가 하나님을 초월자로 저 멀리 어딘가로 보내버렸다. 칼 바르트가 인본주의에 만연하여 있던 내재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되살린 것은, 그가 현대신학에 기여한 대단한 공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초월성은 내재성을 외면한 것이 아니었고, 그것을 구분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한국 보수주의 신앙은 초월성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자유주의는 내재성만 강조하다 보니, 완전한 초월자로 인간의 삶에서는 하나님과 무관한 신앙생활, 혹은 지극히 인간적인 하나님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주일성수를 외치고 ‘오직 예배’를 강조함으로 편협하고 왜곡된 신앙인을 만들어낸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날과 저 날을 구분하여 문제가 생겼던 일이 있었다.

신앙인에게 주일만 강조하다 보면, 평일은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결과 일상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중 신앙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한국 강단에서 외쳤기 때문에, 얼마나 큰 신앙의 왜곡을 가져왔는가? 강단에 서는 것을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하는 이유이다.

오늘의 한국교회 문제는 지도자의 문제이다. 지도자 된 자들은 항상 ‘연자 맷돌’을 생각하고 사역 현장에서 고민하고 분투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올바른 예배, 산제사로 드려지는 예배를 가르쳐야 신앙인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는다.

수없이 쏟아지고 선포되는 말씀 속에서 소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수없이 선포한 말씀과 예배의 현장, 한 해를 깊이 되돌아 볼 일이다.

세르게이 모스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