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동상 제막식이 있은 지 닷새 후 남강은 조회 시간에 단심강에 올라 학생들에게 훈화를 했다.

“여러분, 이상과 현실은 차이가 많습니다. 일제 교과서에서는 만민평등을 주장하지만, 지금 우리는 나라를 빼앗겨 사람이 아니라 개돼지와 같은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프랑스와 같은 선진 제국에서 ‘민족보다는 세계 인류의 평화’를 설파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나라와 국민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평화는 말보다는 실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얼마나 지독히 핍박하는지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 학생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러분의 눈빛이 참 맑아서 늙은 내가 힘이 납니다. 다섯 뫼의 정기를 지닌 여러분은 추악한 세상에 물들거나 굴복하지 않고 각자의 재능을 닦아 이 나라를 구해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삶의 행복이나 불행에 너무 민감하게 대응하지 마세요. 나를 벗어나 더 큰 사명감을 가지고 살면, 그게 곧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며 영원한 행복의 주춧돌을 놓는 것입니다.”

이어 저녁엔 농촌 발전을 목적으로 만든 농민회 회원들을 불러 모아 얘기를 했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엔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하기로 되어 있었다.

남강은 평소 심장이 좋지 않았다. 일찍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이런저런 일로 바빠 미루다가 겨우 시간을 잡은 것이었다.

캄캄한 한밤중에 통증이 시작되었다. 의사가 와서 주사를 놓았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남강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말했다.

“내 스스로를… 나라와 민족에 바치기로 맹세했는데… 이제 죽게 되었네. 내가 죽거든… 시신을 병원에 보내어 해부하고 뼈를 추려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사람의 관절과 골격의 미묘함을 연구하는 데 자료로 삼게 하게나. 바라건대 땅 속에 묻어 흙보탬이나 되게 하여… 이 마음을 저버리지 말도록 해주게나.”

죽더라도 해골로나마 오산학교에 있으면서 학생들과 만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표본으로나마 학생들의 교육을 도와주고 싶었을까. 자나 깨나 죽으나 사나 그에게는 오직 민족과 오산학교 뿐이었다.

장선경 여사가 병이 곧 나을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남강을 안심시켰다.

오래 전, 일제의 고문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했을 때, 간호사이던 장선경을 알게 되었다.

평소 그녀를 눈여겨보던 남강은 청혼을 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로 홀아비로 늙어가다 보니 외롭고 서글펐던 것이다. 장선경은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마침내 남강과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결혼식을 하고 오산으로 온 장선경은 놀랐다. 남강의 집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음식도 상상 밖이었다. 남강 같은 분은 고량진미를 잡수려니 생각했는데, 정반대였다. 무명옷을 입고 조밥을 먹어야 했다.

어느 날 남강이 빙그레 웃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조선 사람은 다 이런 밥을 먹는다오. 그러나 억지로 먹으라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런 굳은 마음을 잃지 말라는 뜻이라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평소 가정보다는 민족의 현실을 걱정하며 무뚝뚝하던 남편의 이 말에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그녀의 안타까운 희망을 남겨 두고 남강은 한밤중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뒷산에서 두견새가 구슬피 울었다.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