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 성신 이영진
▲Jean Cousin the Younger, The Last Judgment(최후의 심판, 1585). 최후의 심판정에 선 그리스도의 후광은 언제나 개기월식, 곧 코로네이션(대관식 섬광)을 연상시킨다. 그 아래서 사람들이 기절해 있다. “성령을 받으라”인 것이다.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눅 21:25-26)”.

ㅡ우리가 기절할 ‘일월 성신([the sun and moon and stars)’의 징조는 무엇인가?

근래 종말에 관한 이슈가 나돌아 이런 저런 종말의 단편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제 이 글이야말로 종말의 예언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비록 환상이나 몽조를 말할 줄 모르나, 문서 예언자의 예언이 어떤 것인지 잘 보시기 바란다.

1. 일월 성신

일월 성신이란 해, 달, 별을 지칭한다. 종말에는 해와 달과 별의 징조가 있어 우리를 기절시킨다 했다. 이 천체(天體)에 관한 맥락은 예수의 권위 있는 어록 중 한 예언이므로, 계시록이나 여타의 종말론을 압도한다.

이 일월성신의 징조는 흔히 달의 모양 변화에서 다양한 적용이 있어왔다. 이를테면 2014년 개기월식이 일어난지 15일 만에 미국에 토네이도가 들이닥쳤다든지, 1453년 개기월식 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했다는 따위의 적용이다.

왜 달일까? 그림자가 해를 잡아먹는 일식(日蝕)은 지역적 도상이지만, 달을 잡아먹는 월식(月蝕)의 도상은 그것이 전역적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관측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이른바 ‘레드 문 또는 블러드 문(Red/ Blood Moon)’이라는 술어를 낳았다.

이 자연 현상을 접목하여 대중적 메시지로 최근 각광을 받은 목회자로는 미국의 존 하기(John Hagee) 목사를 꼽을 수 있다. 그는 2014년 4월 15일부터 이듬해 2015년 9월 18일까지의 테트라디온(τετράδιον), 즉 4차례의 연이은 개기월식 기간에 착안(이런 슈퍼문은 2천년 동안 단 8번만 있었다고), 이를 유대인 역사와 접목한 현세적 종말로 설파했다.

1493년 테트라디온 때는 유대인이 스페인에서 추방당했고, 1949년에는 그들이 건국을 했으며, 1967년에는 아랍권과 6일 전쟁을 치렀으니, 이제 남은 제4차 테트라디온, 곧 기절할 만한 일이 닥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같은 적용은 ‘성서 텍스트- 유대인 역사- 천체(물리)’ 3박자를 맞물린, 기독교인 특유의 자연과학적 전망의 전형일 것이다.

2. 징조의 세 단계 성취, 그리고 또 징조

그러나 이러한 징조의 진정한 해석은 그 징조가 처음 누구에게서 발호됐고, 각 세대는 어떻게 이해했는지 하는, ‘차이’에 관한 해석에 우선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언급한 이 ‘일월 성신의 징조’도 구약성서의 권위 있는 문서 예언자들이 기록으로 남긴 예언에 대한 해석이었던 까닭이다. 예수님의 모든 예언과 계시가 환상과 몽조가 아닌 기록된 말씀(예언)이었다는 사실은, 이 시대 비(非) 문서 예언자들이 유념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그들은 대략 세 명으로 추릴 수 있다. 이사야, 에스겔, 요엘. 별-해-달(또는 해-달-별)의 몰락으로 집약되는 이들의 경고는 일차로 바벨론 포로기의 예루살렘 붕괴로 일단락되었다. 이것이 이 징조의 1차 전제이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이 몰락한 달의 핏빛 수난에 직접 가담함으로써, 그 기록된 징조의 본성을 드러냈다. 이는 해석 행위인 동시에, 성취 행위였던 셈이다. 이러한 제2차 성취가 마가복음 13장 어록에 수록됐다.

그런 다음 제3단계 해석과 성취가 실현된 것은 누가(Luke)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와서이다. 마가복음에서의 일월 성신 징조는 그것이 ‘예루살렘’의 종말에 국한 되었지만, 그 ‘예루살렘’ 종말이 전 세계의 종말과 맞물려 있다는 해석과 성취를 드러낸 것은 누가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일월 성신의 징조에 덧붙여 놀랍게도 이렇게 말한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24절)”.

이로써 이 징조는 요엘이 보았던 핏빛 달의 몰락이 사실은 말세에 모든 육체에 부어내리는 성령 강림이었다는, 누가복음의 속편인 사도행전의 징조가 되었다.

바벨론 포로기 달의 몰락을 새 해석과 성취로 일으킨 예수님의 실천적 예언 행위를, 성령의 심판주적 선교 활동의 징조로 내다봤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바로 우리를 기절시킬 만한 종말이었던 것이다.

3. 보편적 슈퍼 블러드 문

환상과 몽조보다는 기록된 말씀을, 직설의 풀이 행위보다는 성취된 역사로서의 징조를. 이는 현대적인 어떤 고안이 아니라, 상기 나열한 바와 같은 정경의 진수였다는 점에서 종말을 말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궁극적 징조와 해석은 보다 멀리에서 보편화의 길을 걷는 까닭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적용 가능한 원리이다. 이를테면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공산주의의 종말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민주주의의 종말이었던 것처럼(오늘날 레바논화된 유럽을 보라). 이를테면 세월호라는 비극적 사건이 “미안하다, 고맙다”는 직설 행위를 통해 전혀 보편적이지 않은 핏빛인 달의 질료로 전락해버린 것처럼.

모든 지엽적 사회의 성소로서의 예루살렘 파괴가 어떤 징조와 예언에 종사하는지는, 시간을 관통하는 궁극적 해석만이 그 종말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가르는 이치다.

4. 더 나은 징조의 해석

히브리인의 연한은 월력, 곧 우리의 음력에 가깝다. 니산월로 시작한 연한은 윤달인 베아월을 제외하고 총 12달이다. 그러나 이 월력은 바벨론의 월력과 독음 면에서나 절기 면에서 비슷하다. 포로기 이전에 받아들였는지 후에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성경에는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도입한 것으로 보이는, 4개의 월로 연한을 구성한 단위가 나온다. 아빕월, 지우월, 에타님월, 불월이 그것이다. 성경에서 아빕은 파스카 곧 유월절과 연관되어 나오고, 지우, 에타님, 불은 다 성전봉헌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첫째 달 아빕은 새싹인 푸른 색을 뜻한다. 둘째 달 지우는 찬란한/ 밝은 색이라는 뜻이다. 에타님과 불은 각각 흐르는 물과 소출의 색을 표지한다. 따라서 요엘의 핏빛 달은 확실히 유월절과 성전의 완전한 파괴를 본 것이되, 초대교회 설립자들은 성전인 예수의 파괴된 육체와 부활 속에서 그 징조의 본질을 보았다. 달빛의 회복을 본 것이다. 그러니까 종말도 복음으로서의 종말인 셈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참된 예언자는 달의 몰락만이 아닌, 회복까지 선포를 해야 참된 것이다.

그것이 종말 컨텐츠의 질을 결정한다.

YOUNG JIN LEE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