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사랑은 행위가 아닌 관계입니다

성경의 핵심 가르침은 ‘믿음 구원, 불신 저주’입니다. 만일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전 16:22)”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사랑을 구원의 조건으로 만들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以信得救)’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과 배치됩니다. 사랑이 아무리 중요해도 믿음보다 앞설 순 없습니다. 믿음 앞엔 어떤 것도 둘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이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글들에서 종종 사랑을 앞세우는 듯한 뉘앙스를 발견하는데, 조심스런 해독이 요구됩니다.

소위 ‘사랑 장(章)’이라는 별명을 가진 고린도전서 13장도 “믿음 소망 사랑”이라며 믿음을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도,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며 앞 말과 상호 배치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 ‘제일’이라는 말은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으로서가 아닌, 믿음의 열매 혹은 관계적 가치로서 말한 것입니다. 물론 ‘이신득구(以信得救)’한 성도의 이후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특정돼도(신 6:5, 마 22:37), 사랑은 믿음을 근간으로 한 것이지 믿음과 분리된 사랑이 아닙니다.

믿음 없이는 사랑도 없습니다. 믿음과 분리된 사랑은 뿌리 없는 나무입니다. ‘이신득구’한 사람만이 주를 사랑할 수 있으며, 구원받기 위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는 저주를 받지 않기 위해 벌벌 떨며 주님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사랑의 감정은 억지나 강요에 의해 생겨나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사랑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성경 역시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일 4:18)”고 말하며, 사랑과 두려움의 공존불가를 말합니다. 설사 두려움이 억지 사랑을 만들어 낸다 해도, 창기들의 매춘(賣春)처럼 그것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율법적 강요에 의한 사랑은 참된 사랑일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받은 하나님 사랑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듭니다.

그럼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는다(고전 16:22)”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지 못한 자는 저주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특정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여 그와 원수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특정 행위를 하고 안 하고를 본질적인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누구는 행위가 안 좋아서 지옥 가고 누구는 행위가 좋아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었는가 못맺었는가 가 관건입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시 2:12)”.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는 ‘주와 사랑의 관계에 있지 않음, 그것이 곧 저주로다’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든지 ‘저주의 관계’든지 둘 뿐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누가 주와 불화한 가운데 있다면, 그에게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규정해 주지 않아도, 이미 그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주에게서 사랑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한 것이 저주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서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는 저주받은 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분으로 묘사합니까(아 1:3; 2:3)? 모든 피조물이 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흠모하고(시 96:11-12), 성도들은 그를 “사랑하므로 병이 날 지경(아 2:5)”인데, 그에게서 사랑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면 이는 불행입니다.

교회 밖의 불신자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평생을 하나님 예배자로 산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 주일이 되면 그저 의무방어전으로 교회에 나간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친구나 부부,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반려묘(伴侣猫), 반려견(伴侶犬)도 오래 함께 지내면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데, 평생 예배당 출입을 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에게서 사랑할 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불행입니까?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가 주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주의 사랑을 경험한 자는 그에게서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치 못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이라는 말은 ‘주의 사랑을 받지 못했거든’이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은 불가분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속담은 괜한 말이 아닙니다. 사랑만이 사랑을 낳으며,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사랑이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동일하게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성경이 못박은 것은(요일 4:10)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야만 비로소 그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에 대해 예수님이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눅 7:47)”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녀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며 향유를 부은 파격적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많은 사죄의 사랑를 받은 때문이었습니다(눅 7:37-38).

반면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왔는데도, 발 씻을 물도 내어 주지 않았고 그에게 입 맞추지도 않았으며, 향유는커녕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고 했습니다(눅 7:44-46).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사죄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그에 대한 사랑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이란 본래 내리 사랑이다”는 세간의 속담에 성경적 진리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도 인간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물 흐르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내려올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이상주의적(理想主义的)으로 생각하는 낭만주의자들, 사랑을 자아실현의 방편으로 여기는 박애주의자들은 쉽게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사랑을 하나님과의 연합의 방편으로 삼기 위해 몰아적(沒我的)인 사랑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하향적(下向的) 사랑보다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향적(上向的)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성경적인 사랑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향적(下向的) 사랑입니다. 위의 그리스도로부터 부어지는 사랑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때문이며, 그 결과 그에게서 사랑할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곧 저주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했습니까?

마지막으로, 그럼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합니까? 하나님 사랑의 실체요 사랑의 전부인 화목제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요일 4:10)입니다. 그 사랑의 실체를 붙들 때만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됩니다. 결단코 독생자 그리스도 밖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롬 8:39).

그런데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 하나님 사랑의 실체이신 화목제물 독생자를 붙들지 않고, 현세적이고 일시적인 건강, 부, 성공 같은 곁가지를 하나님 사랑으로 붙들면서 진정한 하나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에게서 사랑할 만한 것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